Flag

An official website of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우드로 윌슨
2 MINUTE READ
2017년 5월 4일

우드로 윌슨

 

진보운동의 지도자인 우드로 윌슨은 미국의 제28대 대통령(1913~1921년)으로 재임했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시 증립주의 정책을 취했던 윌슨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한 세계를 만들기” 위해 미국의 참전을 결정했다.

전임 대통령인 루스벨트와 마찬가지로 우드로 윌슨은 자신을 국민 개개인의 대표자로 생각했다. 그는 “오직 대통령만이 국가의 보편적인 이익을 발견해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기대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진보적인 개혁 프로그램을 개발했고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17년에 윌슨은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한’ 세계를 만드는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선포했다.

윌슨은 전쟁의 참혹함을 목격했었다. 그는 1856년에 버지니아에서 장로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남북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서 사제로 있었고 재건 기간에는 전쟁의 포화로 그을린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컬럼비아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프린스턴 대학(당시에는 뉴저지 대학)과 버지니아대 로스쿨을 졸업한 윌슨은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학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1885년에 그는 엘렌 루이스 액슨과 결혼했다.

윌슨은 보수적 성향의 젊은 정치학 교수로서 빠르게 성장했고 1902년에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이 되었다.

그의 이름이 차츰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민주당 보수파 일각에서는 그를 대통령 감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 우선 민주당은 윌슨을 1910년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출마하도록 설득했다. 선거유세를 통해 그는 자신이 보수주의는 물론 그를 후보로 지명한 민주당의 흑막정치와도 무관함을 분명히 밝혔고 그가 주지사로 재임하여 추구하게 될 진보주의적 강령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그는 19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고 개인주의와 주 자치권을 강조하는 ‘뉴 프리덤’이라는 구호 아래 선거운동을 전개했다. 삼파전으로 진행된 대선에서 윌슨은 일반투표 총유권자수의 42%를 득표하는데 그쳤지만 선거인단수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윌슨은 의회에서 세 가지 중요한 법률을 제정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첫 번째는 관세인하를 규정한 ‘언더우드 법’이었는데 이 법안에는 누진 연방소득세법이 첨부되어 있었다. ‘연방준비제도법’의 통과로 연방정부가 그토록 원했던 보다 탄력적인 통화공급이 가능해졌다. 1914년에는 ‘반독점법’에 의거하여 불공정 기업관행을 금지하기 위한 ‘연방통상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16년에 일련의 법률들이 또 한번 쏟아져 나왔다. 한 법안은 아동노동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철도노동자 일일 근무시간을 8시간으로 제한하는 내용이었다. 이 법안들과 ‘그가 미국이 전쟁에 말려드는 것을 막았다’는 선거구호 덕분에 윌슨은 간발의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난 후 윌슨은 미국이 더 이상 세계대전의 와중에 중립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1917년 4월 2일에 그는 의회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미국의 물량 공세에 힘입어 전쟁의 균형은 조금씩 연합군 측으로 기울어졌다. 윌슨은 1918년 1월에 의회에서 14개 항으로 구성된 미국의 평화원칙을 천명했다. 이 원칙의 마지막 조항에 따라 ‘강대국과 약소국 모두에게 정치적 독립과 영토보전을 상호 보장하는…… 국가들의 연맹’의 창설이 제안되었다.

1918년 11월에 독일이 정전협정에 서명함에 따라 윌슨은 항구적인 평화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을 벌이기 위해 파리로 건너 갔다. 귀국한 윌슨은 상원에 국제연맹규약이 포함된 베르사이유 조약을 제출하며 물었다. “이 조약을 거부하고 전 세계를 실망시킬 자신이 있는가?”

그러나 1918년 선거는 의회에서의 무게중심을 공화당 쪽으로 이동시켰다. 베르사이유 조약은 상원에서 7표차로 인준에 실패했다.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전국을 돌며 조약 찬성 여론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극도의 피로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윌슨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는 자신의 두 번째 아내 에디스 볼링 갈트의 극진한 간호로 1924년까지 살았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