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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시스 S.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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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8일

율리시스 S. 그랜트

 

1865년에 사령관으로서 율리시스 S. 그랜트는 북부군을 이끌고 남북전쟁에서 남부동맹에 승리했다. 미국의 영웅으로서 그랜트는 후에 미국의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의회의 재건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노예제의 자취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다.

앤드류 존슨 대통령 임기말에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은 대통령과 의견충돌을 빚은 것을 계기로 공화당 과격파 의원들과 손잡게 되었다. 공화당이 남북전쟁 승리의 상징적 인물이었던 그랜트를 1868년 대통령 후보로 내세운 것은 당연한 논리의 귀결이었다.

미국민들은 그의 취임과 함께 국정 혼란이 종식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랜트는 개혁은 고사하고 국정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도 실패했다. 의회가 방향을 제시해주기만을 기다리는 대통령은 혼란스럽게만 보였다. 백악관을 방문한 한 인사는 “자신 앞에 제시된 문제가 도대체 어떤 것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어찌할 바 모르는 불쌍한 남자”로 그를 평가했다.

1822년에 오하이오에서 가죽무두질 기술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랜트는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중위권 정도의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멕시코 전쟁에 참전한 그는 재커리 테일러 장군의 휘하에 있었다.

남북전쟁 발발 당시 그랜트는 일리노이 주 갈레나에 있는 부친의 가죽상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주지사의 명령으로 자원군 연대의 지휘권을 받게 된 그는 오합지졸이던 병사들을 엄격히 훈련시켜 정예부대로 탈바꿈시켰다. 1861년 9월 그랜트는 자원군 내에서 준장의 계급까지 진급했다.

그는 미시시피 밸리를 북군의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1862년 2월에 그랜트는 헨리 요새를 탈환했고 도넬슨 요새에 공격을 가했다. 남부동맹군 사령관이 조건부협상을 요구해 왔지만 그랜트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 외에는 어떤 협상도 불가하다.”고 답변했다. 남부동맹군은 항복했고 링컨 대통령은 이 전투에서의 공을 높이 인정하여 그랜트를 자원군 소장으로 진급 시켰다.

같은 해 4월 그랜트는 서부전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는 샤일로 전투에서 다소 실망스런 전과를 올렸다. 그랜트를 해임하라는 요구에 맞서 링컨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변호했다. “나는 그랜트를 버릴 수 없다-그는 싸우기 때문이다.”

두 번째 중요한 목표로서 그랜트는 미시시피의 요충지에 위치한 도시 빅스버그를 함락시킴으로써 남부동맹을 두 동강 내기 위해 능수능란하게 군사작전을 벌이고 전투를 수행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채터누가에 대한 남부동맹군의 장악력을 깨뜨렸다.

링컨은 1864년 3월에 그랜트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랜트는 셔먼에게 남부를 공략하도록 지시하고 자신은 포토맥 군을 이끌고 남군의 로버트 리 장군이 지휘하는 북 버지니아 군을 집중 공격하였다.

1865년 4월 9일에 마침내 리 장군은 애퍼매턱스 코트 하우스에서 항복했다. 그랜트는 관대한 항복 조건을 제시하여 이들이 전후에 반역죄로 기소되는 것을 막았다.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랜트는 과거에 군을 통솔하던 방식으로 연방정부를 운영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부하들 중 일부를 백악관으로 불러들였다.

그랜트는 양심적이고 강직한 인물이었지만 백악관에 있는 동안 그의 추종자들로부터 상당한 액수의 뇌물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랜트는 투기꾼이었던 제이 굴드 및 제임스 피스크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키기도 했다. 금(金)시장을 궁지로 몰아넣으려는 둘의 계획을 눈치챈 그랜트는 이들의 계획을 봉쇄하기 위해 재무부장관에게 충분한 물량의 금을 시장에 공급하도록 허가했다. 하지만 이때는 그들의 투기가 이미 경제에 큰 피해를 입힌 후였다.

재선을 목표로 한 1872년 선거운동 중에 그랜트는 개혁성향의 공화당 진보파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그랜트는 이들을 가리켜 “좁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불렀고 이들의 눈은 한데 몰려있기 때문에 “두 눈을 다 뜨고도 송곳구멍을 통해 볼 수 있다”고 조롱했다. 공화당 내에서 장군의 친구들은 ‘올드 가드(보수파)’라는 이름으로 자랑스럽게 불리게 되었다.

그랜트는 과격파의 재건법이 남부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이를 위해 종종 군사력을 사용했다.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그랜트는 금융회사의 파트너가 되었지만 이 회사는 후일 파산했다. 같은 시기에 그는 자신이 후두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랜트는 죽음과 맞서면서 부채를 갚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다. 이렇게 발간된 회고록은 궁극적으로 45만여 달러를 벌어들였다. 1885년 회고록을 완성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세상을 떠났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