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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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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4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매킨리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당시 만 43세도 되지 않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최연소로 제26대 대통령(1901~1909년)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의회와 국민을 진보적인 개혁과 강력한 대외정책을 향해 적극적으로 인도하면서 백악관에 새로운 활력과 힘을 불어넣었다.

매킨리 대통령 저격사건으로 당시 만 43세도 되지 않았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그는 의회와 국민을 진보적인 개혁과 강력한 대외정책을 향해 적극적으로 인도함으로써 백악관에 새로운 활력과 힘을 불어넣었다.

그는 대통령이 ‘국민의 신하’로서 법률이나 헌법에 의해 명시적으로 금지되지 않는 한 공공선(公共善)의 창출에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는 “나는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통령의 권한을 크게 확대시킨 것은 사실이다.”라고 적었다.

루스벨트의 유년시절은 통나무집 출신 대통령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1858년 뉴욕시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역시 몸이 약해 고통을 받았으며 그러한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불굴의 의지를 배우게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아내 앨리스 리 루스벨트와 그의 모친이 1884년 같은 날에 세상을 떠났다. 그 일이 있은 후 루스벨트는 다코다 준주 배드랜즈에 있는 자신의 목장에서 2년을 보냈다. 그는 이곳에서 말을 타고 소떼를 몰며 사냥을 즐기면서 슬픔을 이겨냈는데 심지어 범죄자를 체포하기도 했다. 런던을 방문한 루스벨트는 에디스 캐로우를 만나 1886년 12월에 결혼했다.

미국-스페인 전쟁 중에 루스벨트는 중령 계급으로 러프라이더 연대를 지휘했다. 그는 산후안 전투에서 자신의 연대를 이끌고 공격에 참가했다. 루스벨트는 이 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전쟁영웅들 중 한 명이었다.

뉴욕 주 스캔들로부터 국민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영웅을 필요로 했던 보스 톰 플랫은 1898년 공화당 주지사 후보로 루스벨트를 영입했다. 루스벨트는 선거에서 승리했고 재임기간 빼어난 능력을 보였다.

대통령으로 집무하는 동안 루스벨트는 경제정의를 보장하고 특정집단에 대한 특혜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가 나서 자본가와 노동자로 대표되는 경제주체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최대 조정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신념을 견지했다.

루스벨트는 북서부의 거대한 철도회사 연합조직을 와해시킴으로써 ‘트러스트 파괴자’로서 화려하게 부상했다. 이후 ‘셔먼 법’의 제정에 의해 일련의 반독점 소송들이 뒤따랐다.

루스벨트는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을 국제정치 무대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속담을 인용하기를 즐겼다. “부드럽게 이야기하되 커다란 몽둥이를 지니고 다니라…….”

대서양과 태평양을 직접 잇는 통로의 전략적 필요성을 인식한 루스벨트는 파나마운하 건설을 추진했다. 먼로 독트린에 따라 카리브해 제도에 외국의 기지가 설립되는 것을 막았고 미국이 중남미 지역에 개입할 수 있는 독점적 권리를 주장했다.

그는 러일전쟁의 종전을 중재한 공로를 인정 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일본과는 이민 문제에 관한 신사협정을 체결했으며, 백색함대를 세계일주 친선 항해 길에 오르게 했다.

루스벨트의 뛰어난 업적 중 하나는 환경보존에 앞장 선 것이었다. 서부지역에 광활한 국유림 지대를 조성했고 공공목적으로만 사용하도록 용도를 제한했으며 대규모 치수관개사업도 추진했다.

그는 고음의 목소리와 돌출된 턱 그리고 움켜쥔 주먹으로 청중들을 흥분시켰고 사안의 경중에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지칠 줄 모르고 개혁을 추진했다. 자신의 어린 다섯 자녀들과 뛰어다닐 때나 대사들을 인솔하여 워싱턴 D.C.의 록크릭 공원을 하이킹할 때나 그의 ‘불굴의 삶’은 주변 사람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덕목이었다.

1909년에 대통령직을 떠난 루스벨트는 아프리카로 사파리 여행을 떠났고 귀국해서 다시 정치계로 뛰어들었다. 1912년 대선에서 그는 혁신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스스로가 자신의 신당 이름이기도 한 ‘수컷 큰사슴’처럼 건강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밀워키에서 선거유세 도중 루스벨트는 가슴에 한 광신자의 총탄을 맞았다. 그는 곧 회복하여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지만 그때 그가 남긴 말은 1919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대로 인용할 만한 것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어떤 면에서 비교해도 나만큼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