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lag

An official website of the United States government

존 타일러
2 MINUTE READ
2017년 4월 28일

존 타일러

 

존 타일러는 윌리엄 헨리 해리슨 대통령이 1841년 4월에 서거하자 미국의 제10대 대통령(1841~1845년)이 되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임 대통령 유고에 의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이다.

정적들로부터 ‘사고가 만들어낸 대통령’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던 존 타일러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전임 대통령 유고에 의해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이다.

1790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타일러는 성장기를 거치면서 헌법은 어떠한 경우에도 엄정하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그의 이러한 믿음은 일생을 통해 단 한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타일러는 윌리엄 앤 매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816년부터 1821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타일러는 지나치게 민족주의적인 성향의 법안들에 대해 반대표를 던졌으며 미주리 타협안에 반기를 들었다. 하원을 떠난 뒤에는 두 차례에 걸쳐 버지니아 주지사로 재임하였다. 상원에 있을 때는 자신이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차악(次惡)의 선택으로 잭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기도 하였다. 타일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의회에서 잭슨 행정부에 대항하기 위해 헨리 클레이와 다니엘 웹스터가 창당한 신생 휘그당과 연합한, 주 자치권을 강조하는 남부 세력과 힘을 합했다.

휘그당은 1840년 대선에서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공천하였다. 이는 타일러 후보를 중심으로 당시 잭슨 식 민주주의를 혐오하고 있었던 남부의 주 자치권 주장세력을 규합하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휘그당의 대선 슬로건 역시 ‘티페카누의 영웅과 타일러를 함께’였고 이 또한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민족주의에 남부의 지방분권주의를 약간 첨가한 선거 전략이었다.

당내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자 했던 클레이는 대선기간 중 자신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잠시 접어두어야 했고 웹스터 역시 자신을 ‘제퍼슨 식 민주주의’ 지지자라고 선전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끝나자 둘은 ‘올드 티페카누’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해리슨 대통령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해 골몰했다.

해리슨이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부통령인 타일러가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었다. 해리슨 유고 직후 비록 타일러가 합법적으로 당선된 대통령의 전권을 행사하겠다는 의사를 고수하긴 했지만 휘그당은 사태를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타일러는 심지어 자신의 취임사를 낭독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휘그당의 당 노선을 충실히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타일러가 자신들의 정책방향을 그대로 따를 것이라고 안심했던 휘그당의 환상은 곧 깨지고 말았다.

타일러는 중앙은행 설립 논란에 대해 타협안을 도출하고자 했지만 클레이는 자신의 주장을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았다. 클레이는 타일러가 제안한 이른바 ‘국고 시스템’을 인정하지 않았고 타일러는 클레이가 제출한 중앙은행 및 지점 설립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유사한 은행관련 법안이 재차 의회를 통과했지만 타일러는 주 자치권 보호를 명분으로 다시 한번 거부권을 발동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휘그당은 타일러의 당적을 박탈하였고 웹스터 국무장관을 제외한 모든 국무위원이 총사퇴하였다. 1년 후에는 타일러가 관세관련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자 최초의 대통령 탄핵안이 하원에 제출되었다. 존 퀸시 애덤스가 위원장을 맡은 특별위원회는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용했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탄핵안은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첨예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휘그당이 주도한 의회와 타일러 대통령은 중요한 법안의 통과에 동의하였다. ‘통나무집’ 법안으로 불리는 이 법안의 통과로 서부 정착민들은 국유지 공매 전단계에서 160 에이커까지의 토지를 우선적으로 불하받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고 에이커당 1.25 달러의 토지대금을 후납함으로써 토지에 대한 정식소유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1842년 타일러는 결국 북부 제조업자들을 보호하는 관세법안에 서명하였고 ‘웹스터-애쉬버튼 조약’으로 캐나다와의 국경분쟁이 마무리되었다. 1845년에는 텍사스가 연방으로 편입되었다.

주 자치권을 인정한 덕에 타일러는 대권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지역간 갈등이 심화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종국에는 이를 기화로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타일러는 집권하는 동안 휘그당이 주도했던 원년 내각을 남부출신 보수세력으로 교체하였다. 1844년에는 캘룬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이후에 이러한 보수세력들은 민주당으로 결집하여 주 자치권의 보장과 농장주들의 이익 대변, 노예제도 허용 등을 당 노선으로 주장하게 되었다. 반면 휘그당은 점차 북부의 기업과 농장을 대변하게 되었다.

1861년 남부 주들이 연방 탈퇴를 하자 타일러는 타협안을 찾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결국 그는 남부동맹 창설을 위해 힘을 쏟았고 1862년에 남부동맹 하원의원으로서 생을 마감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마이클 베슐로스,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9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