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출한 정치철학자인 존 애덤스는 조지 워싱턴 행정부에서 초대 부통령을 역임한 뒤 미국의 제2대 대통령(1797~1801년)으로 재임했다.
학식이 풍부하고 사려가 깊었던 존 애덤스는 정치인으로서보다는 정치철학자로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국가와 국민은 갈등이라는 용광로의 불꽃을 거쳐서 탄생한다.”는 그의 믿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개인으로서의 자신의 경험과 미국의 역사를 함께 반영한 것이었다.
애덤스는 1735년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에서 태어났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한 법조인으로서 일찍부터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애국심을 구체화했으며, 제1차 및 제2차 대륙회의에 대표로 참가하는 등 미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전쟁 중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으며 평화조약 협상과정에도 참여하였다. 1785년부터 1788년까지 주영공사로 재직하였고 귀국하여 조지 워싱턴 행정부에서 부통령직을 맡았다.
존 애덤스 같은 추진력과 지성, 명예욕을 갖춘 인물에게 두 차례에 걸친 부통령 재임기간은 매우 곤혹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는 아내인 애버게일에게 “나의 조국은 어이없게도 나에게 인간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보잘것없는 직책을 맡겼다.”라며 불평하기도 했다.
애덤스가 대통령으로 취임했을 당시 미국은 영불전쟁의 여파로 공해상에서의 자국 선박 운항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으며 미국 정계는 당리당략에 치우친 정파간 다툼으로 난맥상을 보이고 있었다.
애덤스 행정부는 미국측 특사 방문을 거부하고 양국간 교역을 단절하고 있던, 당시 프랑스 집권세력인 집정내각에 외교 노력을 집중하고 있었다.
애덤스는 프랑스에 세 명의 사절을 파견했지만 1798년 봄 탈레랑 프랑스 외무장관과 집정내각이 엄청난 액수의 뇌물을 전제조건으로 내세우며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애덤스는 이 모욕적인 사건을 의회에 보고했고 상원은 해당 서한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프랑스측 관련자들의 이름을 ‘X’, ‘Y’, ‘Z’로만 표시했다.
그 결과 미국 전역은 제퍼슨이 ‘XYZ 열병’으로 묘사한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국민적 공분은 애덤스의 부채질에 의해 그 수위가 더욱 높아졌고 대통령이 모습을 보이는 장소마다 군중들은 목이 쉬도록 지지를 외쳐댔다. 연방파에 대한 국민적 인기가 이때만큼 높았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의회는 세 척의 프리깃함을 포함한 추가적인 선박들을 건조하는데 소요되는 비용 지출안과 예비병력 동원안을 승인하였다. 더불어 의회는 ‘외국인 단속 및 치안유지 법안’을 통과시켜 국내에 잠입한 외국인 첩자들을 국외로 몰아내고 친 공화파 언론인들의 비판을 잠재우고자 하였다.
애덤스 대통령은 선전포고를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양국간의 교전이 해상에서 시작되었다. 초기에 미국 선박들은 프랑스 사나포선(私拿捕船)들의 공격으로부터 거의 무방비상태였지만 1800년에 이르러 미국의 무장 상선들과 전함들은 해상로를 확보해 나가게 되었다.
프랑스 해군과의 교전에서 몇 차례에 걸쳐 대승을 거두었지만 미국민들의 전쟁 지지 열기는 차츰 수그러들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프랑스 정부가 전쟁을 감행할 의도가 전혀 없으며 미국측 특사를 정중히 받아들일 것이라는 소식이 애덤스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양국간의 장기 협상이 뒤를 이었고 준전시상태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애덤스 행정부가 프랑스에 평화사절을 보낸 것에 대해 해밀턴주의자들은 극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다. 1800년 대선에서 공화파는 효과적이고 결집되어 있었던 반면, 연방파는 형편없는 분열상을 보였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애덤스는 차기 대통령으로 당선된 제퍼슨과의 선거인단 득표수 차를 불과 수 표 대로 줄였다.
선거 직전인 1800년 11월 1일 애덤스는 새로운 수도에 도착하여 백악관 내에 거처를 마련하였다. 공사가 미처 끝나지 않은 백악관의 눅눅한 방에서의 이틀째 밤에 그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편지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이 백악관과 미래의 백악관 주인들에게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한다. 이 지붕 아래서 오직 강직하고 현명한 지도자만이 통치하기를……”이라고 적고 있다.
은퇴 후 애덤스는 퀸시에 있는 자신의 농장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토마스 제퍼슨에게 정성들인 편지들을 써 보냈다. 1826년 7월 4일 애덤스는 마지막 숨을 거두며 “토마스 제퍼슨은 건재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제퍼슨 역시 이미 몇 시간 전 자신의 저택인 몬티첼로에서 운명한 뒤였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