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먼로는 미국의 제5대 대통령(1817~1825년)이며 건국의 아버지들 중 마지막 대통령이다.
1825년 1월 1일 백악관에서의 마지막 연례 리셉션 장에서 퇴임을 앞둔 제임스 먼로 대통령과 악수할 기회가 가졌던 버지니아 출신의 한 여성 참석자는 그에게서 매우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먼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그는 키가 크고 보기에 좋았다. 그가 입고 있던 옷은 평범하고 유행이 지난 스타일이었다. 몸가짐이 차분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눈에서는 솔직함과 정직함이 배어 나왔다. 그에 대한 제퍼슨 대통령의 찬사가 결코 과장된 수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제퍼슨은 먼로를 가리켜 ‘영혼 안쪽을 뒤집어 보아도 흠집 하나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정직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고 있다.”
1758년 버지니아 주 웨스트모어랜드 카운티에서 태어난 먼로는 윌리엄 앤 매리 대학을 나와 대륙군 복무 시절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며 버지니아 주 프레드릭스버그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젊은 정치인이었던 먼로는 제헌헌법을 제정한 제헌회의의 반연방주의 진영에 합류하였고 1790년에는 제퍼슨주의 지지자로서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794년부터 1796년까지 프랑스 공사로 재임하는 동안 먼로는 프랑스 혁명정신에 강한 동조를 보였다. 그 이후에 로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프랑스와의 루이지애나 매입 협상과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정치적 야망과 추진력 그리고 매디슨 대통령의 지원에 힘입어 먼로는 1816년 대선에 공화주의 진영 후보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연방주의 진영의 반대가 거의 없었던 1820년 대선에서도 무난히 재선에 성공하였다.
먼로는 각료 구성에 있어서 남부 출신의 존 캘룬을 전쟁부 장관으로 임명하는 한편 북부 출신의 존 퀸시 애덤스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는 강수를 두었다. 만약 헨리 클레이가 고사하지만 않았더라도 서부 출신의 걸출한 인물이 내각진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집권 초기에 먼로는 전국 주요 도시를 돌며 지지기반을 다졌다. 그의 보스턴 방문은 ‘상쾌한 기분의 시대’의 개막을 알렸다는 환호를 받았다. 하지만 비록 먼로가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면서 민족주의적 정책을 추진하기는 했지만 불행히도 이러한 ‘상쾌한 기분’은 오래 가지 못했다.
표면적으로는 민족주의가 득세하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1819년 노예주로서 연방에 편입하려던 시도가 좌절되자 경기불황은 미주리 준주(準州) 주민들의 고통을 더욱 증가시켰다. 미주리에서 노예제도를 점진적으로 철폐하기 위한 수정법안은 의회에서 2년 여에 걸친 치열한 공방으로 이어졌다.
결국 ‘미주리 타협안’이 마련되어 미주리를 노예 주로 인정하고 메인 주를 자유주로 연방에 편입하여 미주리 북부와 서부에서 노예제도를 영구히 금지시키는 방안이 강구되었다.
대외정책에 있어서 먼로는 자신의 이름을 딴 기본원칙을 선포하였다. 이 원칙은 보수적인 유럽 정부들이 스페인을 도와 과거 중남미 식민지들을 회복하려 할지 모른다는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천명되었다. 1822년까지 먼로 행정부는 의회로부터 중남미 신생국들과의 외교사절 교환에 필요한 세출안을 투표에 붙이겠다는 확인만을 얻었을 뿐 대외적으로 중남미 신생국들을 인정하는 것은 자제하였다. 이는 먼로와 존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이 1821년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할양하기 전까지는 스페인과의 갈등을 피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강력한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던 영국 역시 스페인의 식민지 재정복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영미가 동맹하여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불간섭’을 선포하자고 제의하였다. 제퍼슨과 매디슨 전 대통령은 먼로에게 영국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조언했지만 애덤스 국무장관은 “영국 전함의 뒤를 따르는 작은 배가 되는 것보다 러시아와 프랑스에 미국의 원칙을 명백히 천명하는 편이 더 솔직하고 당당한 처사”라는 의견을 밝혔다.
먼로는 애덤스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식민지화 중단을 촉구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태평양 연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 역시 엄중히 경고하였다. 그는 “아메리카대륙은 자유와 독립의 원칙에 따라 앞으로는 유럽의 어느 강대국도 이를 미래의 식민지화 대상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선언하였다. 1831년 먼로가 서거한 지 20여 년이 지난 뒤 이러한 원칙은 ‘먼로 독트린’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