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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스 부캐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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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8일

재임스 부캐넌

 

제임스 부캐넌은 미국 남북전쟁 직전에 미국의 제15대 대통령(1857~1861년)으로 재임했다. 그는 펜실베이니아 출신의 유일한 대통령이며 평생 독신으로 산 유일한 대통령이다.

큰 키에 위엄을 갖춘 외모와 턱까지 칼라를 세워 올려 딱딱할 정도로 형식을 지킨 옷차림으로 기억되는 제임스 부캐넌은 평생을 독신으로 보낸 유일한 대통령이다.

국가가 급속한 분열상을 보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부캐넌은 정치적 현실을 오판하였다. 그는 노예제도 허용 논란으로 깊어진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헌법의 해석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그 결과 남부의 논리에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던 당시 헌법의 법리해석을 북부에서 더 이상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첨예한 지역갈등이 정치구도를 재편했다는 현실도 직시하지 못했다. 민주당은 분당을 겪고 있었고 휘그당은 붕괴되어 공화당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1791년 펜실베이니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부캐넌은 디킨스 대학을 졸업했으며 토론에 능하고 법률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5선 하원 의원이었고 러시아 공사로 잠시 재임한 후에는 10년 동안 상원의원을 지냈다. 부캐넌은 포크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으로 재직했으며 피어스 행정부에서는 영국 공사로 임명되어 유럽에 머물고 있었다. 공사로 파견된 동안 정쟁으로 얼룩진 국내 정치계를 떠나 있었던 경력이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하여 부캐넌은 1856년 대선에서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통령당선자 신분으로 부캐넌은 난국을 타개할 방법을 고민하였다. 그의 결론은 각료 임명에 지역적 안배를 고려하고 쟁점 사항에 대한 연방대법원의 해석을 근거로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연방대법원은 노예제 금지조치의 합헌성을 심의하였고 심의에 참여했던 두 명의 연방대법관이 부캐넌에게 그 결과를 귀띔해주었다.

이에 고무된 부캐넌은 취임사에서 연방대법원이 노예제의 효력에 관한 문제를 “신속하고 최종적으로” 심의할 것이므로 이는 “다행스럽게도 실질적인 심각성을 별로 갖지 않는 문제”라고 밝혔다.

그로부터 이틀 뒤 로저 B. 태니 연방대법원장은 ‘드레드 스콧’ 판결을 내렸다. 즉 의회에게는 개인으로부터 준주(準州) 내에서의 노예 소유권을 빼앗을 법적권한이 전혀 없다는 요지의 판결이었다. 남부에서는 이 판결을 크게 환영하고 나섰지만 북부에서는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부캐넌은 캔자스를 노예주로 지정함으로써 이 난국을 일단락 지으려 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어떻게 하든 관철하려 했지만 이러한 시도는 공화당을 더욱 자극했을 뿐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도 이탈자를 만들어내는 부작용을 낳았다. 캔자스는 여전히 준주로 남아 있었다.

1858년 선거를 통해 공화당이 하원에서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했지만 하원에서 통과된 중요한 법안들은 예외없이 상원의 남부의원들이나 대통령의 거부권에 의해 법률로 제정되지 못했다. 연방정부는 교착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지역간 갈등은 극단으로 치달아 1860년 대선에서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로 분열되어 각각 다른 후보를 지명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공화당이 에이브러햄 링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순간 그가 대통령직에 오르게 되리라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었다. 물론 남부에서는 단 한 표도 링컨 후보에게 던져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부의 ‘노예제 지지자들’은 공화당 행정부를 인정하느니 차라리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선택하였다.

낙담한 부캐넌은 서둘러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권을 부인했지만 연방정부에 탈퇴를 막을 법적 권한이 없다는 점 역시 인정하였다. 그는 타협안의 도출을 희망했지만 남부의 지도자들은 타협을 원하지 않았다.

부캐넌은 보다 군사적인 전술을 택하였다. 그는 국무위원들의 사퇴로 공석이 된 내각진을 북부 인사로 채우는 한편 전함 ‘스타오브웨스트’를 파견하여 섬터 요새에 지원병력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861년 1월 9일 ‘스타오브웨스트’는 섬터 요새에 정박하지 못했다.

그 이후 부캐넌은 얼마 남지 않은 임기를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1861년 3월 그는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자신의 저택 ‘휘트랜드’로 은퇴했고 7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후임 대통령 앞에는 암울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무거운 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