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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버 클리블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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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8일

그로버 클리블랜드

 

1885년에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후보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그로버 클리블랜드(제22대·제24대 대통령)는 백악관을 떠난 뒤 4년 뒤에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최초의 대통령이다(1885~1889년과 1893~1897년).

남북전쟁 이후 민주당 후보로는 최초로 대통령에 당선된 그로버 클리블랜드는 백악관을 떠난 뒤 4년 뒤에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최초의 대통령이다

클리블랜드는 장로교 성직자의 아홉 자녀 중 한 명으로 1837년 뉴저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욕 주 북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버펄로에서 변호사로 개업하고 있는 동안 그는 무슨 일이든 자신에게 맡겨지면 전력을 다해 집중하는 인물로 이름이 알려졌다.

44세가 되어 그는 정치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그로부터 3년 후에는 백악관까지 입성하게 되었다. 자신을 개혁가로 내세운 클리블랜드는 1881년 버펄로 시장으로 선출되었고 그 후에는 뉴욕 주지사에 당선되었다.

클리블랜드는 민주당과 공화당 개혁세력의 공동 지원을 받아 대통령직에 오를 수 있었다. ‘머그웜프(Mugwump)’라 불렸던 공화당 개혁세력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메인 주 출신의 제임스 G. 블레인의 전력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미혼이었던 클리블랜드는 취임 초기에는 백악관이 제공하는 모든 호사에 불편을 느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녁식사 시간이 다 되었는데 식당에서 분명 준비하고 있을 프랑스 요리 대신에 절인 청어와 스위스 치즈 그리고 루이스 고기 요리를 먹었으면 좋겠다.”고 적었다. 1886년 6월에 클리블랜드는 당시 21세이던 프랜시스 폴섬과 결혼했다. 그는 백악관에서 결혼식을 올린 유일한 대통령이다.

클리블랜드는 어떠한 집단에도 특혜를 주지 않는 정책을 강력히 추구했다. 가뭄 피해를 입은 텍사스 농가에 곡물종자를 지원하기 위해 1만 달러를 지출하는 예산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이러한 사안에 연방자금을 지원하기 시작하면 국민들이 정부로부터 과도한 보호를 기대하게 되고 결국에는 우리의 국민성인 강인함을 약화시키게 된다.”

그는 적법하지 않은 연금청구를 한 남북전쟁 참전군인들을 위한 민간연금 법안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했다. 북부군 참전용사들의 전국조직인 GAR (Grand Army of the Republic)의 압력을 받은 의회가 군복무가 아닌 다른 이유로 장애를 입은 장애인들에게도 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통과시키자 이 역시 거부했다.

그는 철도회사들이 국고보조를 받아 보유하고 있던 서부지역 토지에 대한 조사를 지시하여 철도회사들의 반발을 샀다. 그는 철도회사들에게 8,100만 에이커를 연방정부에 반환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또한 철도산업을 규제하는 최초의 법률인 ‘주간통상법(州間通商法)’에 서명하였다.

1887년 12월에 클리블랜드는 고율의 보호관세를 인하하도록 의회에 요청했다. 1888년 대선에서 공화당에 유리하게 작용할 쟁점을 제공했다는 주위의 비난에 대해 그는 “지지하는 정책이 없다면 선거에 당선되고 재선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는 1888년 대선에서 패했다. 비록 일반투표에서는 상대후보 벤자민 해리슨을 눌렀지만 선거인단 수에서 몇 표차로 고배를 마셨다.

1892년 대통령에 재선된 클리블랜드는 심각한 경기침체에 직면했다. 그는 기업도산, 농가 모기지 압류, 실업문제에 우선하여 먼저 재정 위기에 직접적으로 대응했다. 그는 가벼운 통화팽창 정책에 기반한 ‘셔먼 은(銀) 매입법’을 폐기하는데 성공하였고 월스트리트의 지원을 받아 재무부 금(金) 보유고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시카고의 파업 철도노조가 법원강제명령을 준수하지 않자 클리블랜드는 연방군을 동원하여 상황을 해결하였다. 그는 “시카고에 엽서 한 장을 배달하기 위해 미합중국 육해군 전군을 필요로 한다고 해도 그 엽서는 틀림없이 배달될 것이다.”라고 고함을 쳤다.

철도 노조 파업 가담자들에 대한 클리블랜드의 과감한 조치는 많은 미국민들의 자긍심을 불러 일으켰다. 영국으로 하여금 베네수엘라 국경분쟁 중재안을 받아들이도록 촉구했을 때의 힘있는 외교방식 역시 그러했다. 하지만 경기침체를 극복하기 위한 그의 정책들은 국민적인 호응을 얻지 못했다. 1896년 대선후보 지명에서 당은 그를 버리고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선택했다.

백악관을 떠난 뒤 클리블랜드는 뉴저지 주 프린스턴에서 노후를 보냈다. 그는 1908년 사망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