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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피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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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4월 28일

프랭클린 피어스

 

프랭클린 피어스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국이 안정된 시기에 미국의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했다(1853~1857년). 뉴잉글랜드 출신이었던 피어스는 남부 출신 정책참모들의 조언을 적극 반영함으로써 결국 남북전쟁을 불러온 국가분열을 억제하고자 했다.

프랭클린 피어스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국이 안정된 시기였다. 1850년 타협안의 결과 미국은 지역갈등 위기를 무사히 넘긴 것처럼 보였다. 뉴잉글랜드 출신이었던 피어스는 남부 출신 정책참모들의 조언을 적극 반영함으로써 제2의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하지만 피어스의 정책들은 안정을 유지하기는커녕 연방의 붕괴를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1804년 뉴햄프셔 주 힐스브러에서 태어난 피어스는 보도인 대학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법률을 공부한 그는 곧 이어 정계에 입문했다. 24세의 나이에 뉴햄프셔 의회에 진출했으며 2년 후에는 의장직을 맡았다. 1830년대에 피어스는 처음에는 하원의원으로 이후에는 상원의원으로 워싱턴 정가에 진출했다.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던 피어스는 뉴햄프셔 친구들의 제안으로 1852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자 경선에 참가하였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원들은 1850년 타협안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와 노예제 논란을 호도하는 어떠한 기도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강령의 제정에 쉽게 동의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자를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무려 48번의 재투표를 거쳐 높은 인지도를 자랑하던 후보자들을 차례로 탈락시키고 마지막으로 ‘다크호스’였던 피어스를 지명하기에 이르렀다.

아마도 민주당이 타협안에 대해 보다 확고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점과 상대후보였던 스콧이 남부에서 신임을 얻지 못했다는 점이 요인으로 작용하여 피어스는 휘그당 대통령 후보였던 윈필드 스콧 장군을 일반투표에서 간발의 차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피어스 부부는 대통령 취임 두 달 전 기차사고로 당시 11살이던 아들을 잃었다. 슬픔에 잠긴 피어스는 정신적으로 피로한 상태에서 임기를 시작했다.

취임사에서 그는 국내적으로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대외적으로는 세계 각국과의 활발한 교류의 시대를 개막할 것임을 선포했다. 더불어 미합중국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영토확장을 계속할 수 있으며 ‘어떠한 악의 위협’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했다.

영토확장에 대한 피어스의 가벼운 제스처만으로도 북부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북부에서는 피어스가 노예제도를 다른 지역까지 확대시키려는 남부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영국으로 하여금 중미 해안 일부 지역에서의 기득권을 포기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나 스페인에게 쿠바를 매각하도록 설득한 예 등은 북부의 심기를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남북간의 긴장을 최고조로 재연한 사건은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의 제출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미주리 타협안은 사실상 파기되고 서부에서의 노예제도 허용 논란은 다시 시작될 운명이었다. 이 법안을 제출한 스티븐 더글라스 상원의원은 시카고-네브래스카-캘리포니아를 잇는 철도를 건설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남부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지지했던 제퍼슨 데이비스 전쟁부 장관은 이미 피어스를 설득하여 제임스 개즈던으로 하여금 멕시코정부로부터 철도부지를 구입하도록 조치한 뒤였다. 그는 오늘날의 애리조나 남부와 뉴멕시코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1천만 달러를 지불하고 멕시코로부터 매입했다.

서부지역을 철도가 운행하는 지역으로 개발하려던 더글라스의 법안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그의 법안은 해당 지역의 주민들이 노예제도 허용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캔자스로의 대대적인 인구 유입이 시작되었고 북부와 남부는 캔자스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면으로 대치하였다. 두 세력 간에 무력충돌이 시작되었고 ‘피 흘리는 캔자스’는 남북전쟁의 전주곡이 되었다.

임기말이 되어서야 피어스는 가까스로 “캔자스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선언할 수 있었지만 그의 바람과는 반대로 민주당은 차기 대통령 후보로 피어스를 지명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논란을 일으킬 소지가 적다고 판단된 뷰캐넌을 선택하였다. 후임 대통령에게 분열 위기의 폭풍 전야 정국을 물려준 피어스는 뉴햄프셔로 돌아왔다. 그는1869년에 사망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