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커리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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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미국 전쟁과 1812년 전쟁 당시부터 미육군의 장군이자 국민영웅인 재커리 테일러는 제1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849년 3월부터 1850년 7월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북부와 남부는 멕시코로부터 할양받은 지역에서 노예제도를 허용해야 할지 여부를 두고 극한 대립을 달렸다. 일부 남부 주들은 연방으로부터의 탈퇴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견지했던 재커리 테일러는 대화에 의한 타협이 통하지 않는다면 무력에 의존해서라도 연방을 지켜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1784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난 테일러는 출생 직후 가족이 켄터키의 대농장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살았지만 대화 도중에는 종종 목화재배에 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집은 루이지애나 주 배턴루지에 있었고 미시시피에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테일러는 노예제도나 남부 지역주의를 옹호하지 않았다. 군인으로서 보낸 40여 년의 삶은 그를 철저한 민족주의자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테일러는 자신의 인생 중 25년을 인디언 전투 최전선에서 보냈다. 멕시코 전쟁에 참가한 그는 몬트레이와 부에나비스타에서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었다.

테일러 장군의 격식을 따지지 않는 태도와 휘그당 성향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포크 대통령은 그를 멕시코 북부에 대기하도록 지시하고 윈필드 스콧 장군으로 하여금 멕시코시티를 함락하도록 명령했다. 이러한 처사에 대노한 테일러는 “멕시코시티와 몬테주마의 궁전으로의 길을 연 것은 부에나비스타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인간들이 승리를 자축하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늙은 러프앤레디’로 불렸던 테일러의 소박한 성격은 정치인으로서는 유용한 자산이었다. 그의 오랜 군 경력은 북부 유권자들의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고 자신의 농장에 100명의 노예를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은 남부 유권자들의 표를 모으는데 유리했다. 그는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서 자신의 분명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휘그당은 테일러를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하여 민주당 후보인 루이스 캐스와 대권경쟁을 벌이도록 했다. 대선에서 루이스 캐스는 각 준주(準州)의 주민들이 자신들의 지역에서 노예제를 허용할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대선에서 북부 유권자들은 노예를 거느리고 있던 테일러나 ‘주민 주권론’ 옹호론자였던 캐스 둘 중 어느 후보도 지지하지 않았다. 그 결과 노예제 확산중단을 기치로 내세운 자유토지당이 창당하게 되었고 마틴 반 뷰렌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였다. 대선 과정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는 동안 자유토지당은 캐스의 지지층을 잠식했고 결과적으로 테일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비록 테일러가 입법부를 장악하고 있던 휘그당의 노선에 동조하기는 했지만 휘그당 지도부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는 초당적이고 탈 정치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하였다. 항상 산만했던 테일러는 과거 인디언과 전투를 벌이던 주먹구구식 전략으로 행정부를 운영하려 했다.

역사적으로 주민들은 새로운 주헌법을 제정할 때 노예제를 인정할지 여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새로 확장된 영토에서의 노예제 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테일러는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정착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주헌법을 기초하고 주의 지위를 신청하도록 촉구하였다. 그 결과 이 지역들은 준주(準州) 단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주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뉴멕시코와 캘리포니아 어느 쪽도 노예제를 허용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남부 주들은 분노하였다. 의회 역시 대통령이 의회의 정책입안 기능을 무시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게다가 테일러가 제시한 해결책은 몇 가지 심각한 부작용을 안고 있었다. 예를 들어 북부인들은 컬럼비아 특별구에서 열리는 노예시장을 혐오하고 있었고 남부인들은 도망친 노예를 보다 엄격하게 처벌하는 법률을 요구하고 있었다.

1850년 2월 테일러 대통령은 연방탈퇴를 주장하는 남부 지도자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그는 법 집행을 위해 필요하다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설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는 “멕시코 전 당시 탈영병과 첩자를 목매달았던 것처럼 연방의 존속을 위협하는 반란세력을 교수형에 처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테일러는 결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리고 상황은 예기치 못한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7월 4일 워싱턴기념관에서 폭염 속에 개최된 독립기념일 행사에 참관했던 테일러는 돌연 몸져눕게 되었다. 닷새 후 그는 사망했다. 그가 사망하자 타협안이 타결되었고 내전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11년 후 테일러가 공언했던 전쟁은 기어코 발발하고야 말았다. 그의 외아들 리처드 테일러는 남부동맹군의 장군으로 이 전쟁에 참전하였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