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매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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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는 1897년 3월 4일부터 1901년 9월 14일에 암살될 때까지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으로서 재임했다. 그는 미국-스페인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미국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보호관세를 올린 바 있다.

경기 침체기였던 1896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클리블랜드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인 마르커스 알론조 해나는 자신의 친구인 윌리엄 매킨리를 ‘번영을 불러올 인물’로 추켜세우며 그의 대통령 후보 지명을 보장했다. 민주당은 후일 약간의 통화팽창을 가져오게 될 ‘무제한적인 금화와 은화의 자유주조’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을 후보로 지명했다.

해나가 브라이언 후보의 은화 자유주조 정책에 위기를 느낀 동부 공화당 세력으로부터 모은 고액의 자금을 선거운동에 활용하는 동안 매킨리는 오하이오 주 캔턴에 위치한 자신의 집 앞 현관에서 대의원들과 만났다. 그는 1872년 대선 이래 일반투표에서 가장 큰 표차로 당선되었다.

1843년 오하이오 주 나일스에서 출생한 매킨리는 앨러게니 대학에서 잠시 수학하였고 남북전쟁이 발발하던 순간에는 지방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연방군에 이등병으로 입대한 그는 종전과 함께 자원군 명예소장으로 전역하였다. 매킨리는 법률을 공부했고 오하이오 주 캔턴에서 개업했으며 지역 은행가의 딸이었던 아이다 색스턴과 결혼했다.

34세 때 그는 의회에 진출했다. 인간적인 매력과 타의 모범이 되는 성품 그리고 예리한 지성을 바탕으로 그의 지위는 빠르게 상승했다. 그는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의회 세입위원회에 소속되었다. 그와 함께 의원생활을 했던 로버트 M. 라 폴레트 시니어는 매킨리가 대부분의 경우 “새로운 견해들을 대변”했고 “중대한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서…… 거의 국민의 편에 섰고 사적인 이익을 배격했다.”고 회고했다.

하원의원으로 보낸 14년 간 그는 공화당 내에서 주도적인 관세문제 전문가로 위치를 굳혔으며 1890년 제정된 법률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이듬해 그는 오하이오 주지사로 선출되어 두 번의 임기를 마쳤다.

매킨리가 대통령으로 취임할 무렵 1893년 대공황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그와 함께 은화 주조에 관한 극단적인 논쟁이 불붙고 있었다. 그는 통화 논쟁에 대한 조치는 뒤로 미루고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세율의 관세를 제정하기 위한 임시의회를 소집했다.

매킨리 행정부의 친 기업적인 분위기 아래 미국의 기업들은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언론은 매킨리를 독점 기업들의 이익을 대변하던 ‘유모’ 해나의 손에 이끌려 다니는 어린 아이로 풍자했다. 하지만 그는 해나의 영향력에 압도되지 않았다. 매킨리는 독점 기업들을 겨냥하여 ‘공공의 선을 위협하는 위험한 음모’라고 공격했다.

경제적 번영이 아닌 대외정책이 매킨리 행정부의 주요 관심사였다. 언론은 스페인 군과 쿠바 혁명세력 사이의 교착상태를 보도하면서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사망하고 나머지는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들끓는 여론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전쟁을 선택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의회나 미국민의 여론을 가라앉힐 수 없었던 매킨리는 1898년 4월 중립적 개입 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의회는 선전포고에 준하는, 쿠바의 해방 및 독립을 위한 세 개의 결의안을 통과했다.

100일 동안 진행된 이 전쟁에서 미합중국은 쿠바 산티아고 항 바깥 쪽에 집결해 있던 스페인 함대를 격침하고 필리핀 마닐라를 손에 넣었으며 푸에르토리코를 점령했다.

후에 하원의장을 지낸 ‘엉클 조’ 캐논은 매킨리가 땅 위에 귀를 너무 바짝 붙이고 있어서 귀 안에 메뚜기들이 가득 차 있다고 비유했다. 매킨리가 쿠바를 제외한 나머지 스페인 식민지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는 전국을 돌며 국민들의 친제국주의 여론을 감지했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은 필리핀, 괌, 푸에르토리코를 합병하게 되었다.

1900년 대선에서도 매킨리는 브라이언 후보를 상대했다. 브라이언이 제국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고 나선 반면 매킨리는 ‘풀 디너 페일(먹거리로 가득 찬 도시락 통을 이르는 말로 경제적 번영을 의미함)’을 차분히 내세웠다.

상서로운 조짐과 함께 시작된 그의 두 번째 임기는 1901년 9월에 비극적 종말에 다다르게 된다. 버펄로 범 아메리카 박람회장에서 방문객들을 접견하고 있던 매킨리는 무정부주의자가 쏜 두 발의 총탄을 맞았다. 그는 8일 뒤 사망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