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헨리 해리슨

09_william_henry_harrison
09_william_henry_harrison

미국 육군장교이자 정치가였던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미국의 제9대 대통령(1841년)으로 당선되었는데 그 당시 최고령 당선자이다.

한 민주당계열 신문은 해리슨 후보를 “그에게 사과술 한 통과 일년에 2천 달러씩 연금 정도나 쥐어줘 보라. 내가 보장하건대 그는 꼼짝도 않고 석탄난로 앞에 앉아서 도덕철학이나 공부할 것”이라며 비아냥댔다. 그러나 이런 조롱을 호재로 삼은 휘그당은 1840년 대선에서 자신들의 후보인 해리슨의 소시민적인 친근감을 전면에 내세워 상대 후보인 반 뷰렌과의 차별화를 꾀했다. 인디언과의 전투에서 무공을 세우고 퇴역하여 통나무집에 살면서 사과 술을 마시는 해리슨과 샴페인을 음미하는 귀족적인 반 뷰렌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하지만 실제로 해리슨은 유서 깊은 버지니아 대농장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는 1773년 버클리에서 태어났으며 햄프덴-시드니 대학에서 고전과 역사를 전공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리치몬드에서 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인 1791년 해리슨은 돌연 관심분야를 바꾸게 된다. 그는 육군 제1보병 장교로 임관하여 노스웨스트 지역으로 파견된 후 생의 오랜 기간을 그 곳에서 보냈다.

해리슨은 인디언을 상대로 한 ‘쓰러진 나무 전투’에 ‘미친 앤쏘니’ 웨인 장군의 부관으로 참전했다. 이 전투로 인해 미국은 오하이오 지역 대부분을 정착촌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1798년 육군에서 전역한 해리슨은 노스웨스트 준주(準州)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노스웨스트 최초의 지역 대표로 의회에 진출하였으며, 기존의 노스웨스트 준주를 노스웨스트와 인디애나 두 준주로 분할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801년 인디애나 주지사로 임명된 후 12년 동안 재임하였다.

주지사로서 해리슨의 주요한 임무는 인디언 거주지역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확보하여 정착민들이 새로운 땅으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이 반격해 오면 정착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역시 주지사의 중요한 책임이었다.

1809년에 이르자 정착촌에 대한 인디언의 위협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였다. 웅변에 능하고 정력적이었던 인디언 추장 ‘티컴세’는 자신의 종교적 형제인 ‘예언자’와 힘을 합해 더 이상의 영토 침탈을 막기 위해 인디언부족동맹을 규합하게 되었다. 1811년 해리슨은 연방정부로부터 이 인디언부족동맹을 공격해도 좋다는 승인을 얻게 된다.

티컴세가 다른 부족들을 동맹으로 규합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 있는 사이 해리슨은 1,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예언자의 마을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했다. 11월 7일 동트기 전 무렵 인디언 병력이 티페카누 강가에 숙영하고 있던 해리슨의 부대를 기습 공격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인디언들은 퇴각하였고 아군 측 사상자 역시 190여 명에 달했다.

티페카누 전투의 승리로 해리슨의 명성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티컴세의 인디언부족동맹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인디언의 공격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있었으며 1812년 봄이 되자 인디언의 위협은 다시 이 지역을 공포로 몰아 가고 있었다.

1812년 영미전쟁에서 해리슨은 육군 준장으로 진급하여 노스웨스트 군을 지휘했고 더 많은 승리를 기록했다. 1813년 10월 5일 이리 호 북쪽에서 벌어진 테임즈 전투에서 해리슨의 부대는 영국-인디언 연합군을 격퇴하고 티컴세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패배한 인디언 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당시 노스웨스트로 불렸던 지방에서 인디언에 의한 심각한 저항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전투 이후 해리슨은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국민적 영웅을 필요로 했던 휘그당은 그를 1840년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해리슨은 15만 표에 못 미치는 득표수로 과반수를 넘어섰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234 대 60으로 압도적 승리를 거두었다.

1841년 2월 워싱턴에 입성한 해리슨은 다니엘 웹스터로 하여금 여러 고전을 인용하여 화려한 수사로 치장한 자신의 취임사를 교정해 줄 것을 지시했다. 웹스터는 사어들로 도배된 취임사의 여러 부분을 삭제해야 했고 원고 교정과정에서 자신이 “완전히 죽어 있는 17명의 로마 프로콘술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죽여야 했다고 농담조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웹스터가 그처럼 흡족한 기분이었던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해리슨은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취임사에서 그는 의회를 통해 전달되는 국민의 목소리에 복종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취임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그는 독감에 걸렸고 이 독감은 폐렴으로 발전했다. 1841년 4월 4일 그는 유명을 달리했고 임기 중에 사망한 최초의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더불어 그의 죽음과 함께 휘그당의 정책들로 함께 사장되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