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반 뷰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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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반 뷰렌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제8대 부통령과 제10대 국무장관을 역임한 뒤 제8대 대통령(1837~1841년)이 되었다. ‘작은 마법사’로 불리던 그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당시 미국 경제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1837년 금융 공황이 미국을 덮쳤다.

마틴 반 뷰렌은 신장이 5피트 6인치(165cm)에 불과했지만 항상 말쑥한 차림에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옷차림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흠잡을 데 없는 외모 뒤에는 인간적인 친근함과 함께 보잘것없는 성장배경이 감추어져 있었다. 네덜란드계 이민의 후손인 반 뷰렌은 1782년 뉴욕 킨더훅에서 술집을 운영하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변호사로 활동하던 반 뷰렌은 뉴욕 정치계에 입문하게 된다. 뉴욕의 정치단체인 ‘알바니 리젠시’를 이끌던 그는 주도면밀하게 공직을 분배하고 포상금을 나누어주는 방법으로 선거에서 표를 모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반 뷰렌은 공복으로서의 임무 역시 충실히 수행하였으며 1821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827년까지 반 뷰렌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 진영의 북부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잭슨은 반 뷰렌의 공을 인정하여 그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존 캘룬이 추천한 인물들로 꾸려진 내각이 잭슨 대통령에 대해 점차 미온적인 충성심만을 보이게 되자 반 뷰렌은 잭슨에게서 가장 큰 신임을 받는 정책자문으로서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잭슨은 반 뷰렌을 지칭하여 “술책과는 거리가 먼 신뢰할 만한 인물”로 평가했다.

잭슨 대통령과 차기 대권주자인 캘룬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자 내각 내에서도 정파 간의 분열상이 갈수록 심화되었다. 반 뷰렌은 정국의 교착상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자신과 이튼 전쟁부 장관이 동반 사퇴할 테니 캘룬측 인사들도 역시 각료직에서 사퇴하라는 제안을 냈다. 잭슨 대통령은 새로 내각을 구성하였고 반 뷰렌의 공을 높이 사 이번에는 그를 주영공사로 임명하려 하였다. 캘룬 부통령은 상원의장이던 자신의 직위를 이용하여 주영공사 임명안을 부결시켰고 반 뷰렌을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작은 마법사’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반 뷰렌은 1832년 대선을 통해 잭슨 캠프에서 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836년에는 마침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반 뷰렌은 자신의 취임사 중 일부를 세계 각국이 모델로 삼게 될 미국식 자본주의의 실험에 대한 설명에 할애하였다. 취임 당시 미국 경제는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지만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 1837년 금융 공황이 미국을 덮쳤다.

엄밀히 말하자면 1837년 금융 공황은 19세기 호황-불황 경제주기의 정상적인 패턴에 따라 일어난 자연적인 현상이었지만 잭슨 행정부의 잘못된 재정정책이 최악의 사태를 몰고 왔다. 잭슨 재임 중에 미합중국 제2의 중앙은행 설립이 좌절됨에 따라 일부 주립 은행들이 아무 제약없이 인플레이션을 조장하도록 방치되는 부작용을 가져왔으며, 은행 대출이 쉬워지자 무차별적인 땅투기가 서부지역을 휩쓸었다. 이 투기 열풍을 중단시키기 위해 잭슨 행정부는 1836년 이른바 ‘정화(正貨) 회람’이라는 행정명령을 내려 공유지 매입시 반드시 금이나 은과 같은 정화만을 사용하도록 조치하였다.

1837년에 공황이 시작되자 수백 개의 은행과 기업이 문을 닫았고 수천 명은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잃었다. 그로부터 약 5년 동안 미국은 역사상 최악의 경기침체로 허덕여야 했다.

경제위기를 완화하기 위해 이후 수십 년 동안 행해진 갖가지 처방들은 반 뷰렌과 그의 반대세력 모두 만족시키지 못했다. 잭슨 전 대통령의 긴축경제정책을 그대로 답습한 반 뷰렌의 경제정책은 경기침체를 오히려 악화시키고 장기화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왔다.

대공황의 원인이 기업의 무분별한 사업확장과 과도한 은행대출에 있다고 선언한 반 뷰렌은 정부재정의 균형을 유지하는데 총력을 쏟았다. 그는 새로운 중앙은행의 설립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정부자금을 주립은행에 투입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반 뷰렌은 정부 거래를 전담할 독립적인 재무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싸웠다. 내륙개발을 위한 연방정부 지원에 있어서도 관련지출을 완전히 삭감함으로써 정부는 공공사업에 사용하던 장비들마저 매각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노예제도 확산에 대한 반대입장을 점차 굳히게 된 반 뷰렌은 텍사스 연방편입을 거부하였다. 이는 텍사스를 편입할 경우 노예주로 편입될 것이 거의 확실했고 멕시코와의 영토분쟁에 휘말리게 될 위험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1840년 대선에서 휘그당에 패하여 재선에 실패한 반 뷰렌은 1848년 대선에서 자유토지당 대통령 후보로 재차 대권에 도전했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그는 1862년 사망하였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