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카터(지미 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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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는 1977년부터 1981년까지 미국의 제39대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그는 국제분쟁에 대한 평화적 해결책을 찾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증진하고 경제적·사회적 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한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지미 카터는 미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있고 국민을 이해하는’ 정부의 건설을 간절히 원했다. 재임기간 중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지만 고유가, 고인플레이션, 세계정세의 긴장국면 속에서 카터 행정부가 그러한 국민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임스 얼 카터 2세’라는 본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그는 1924년 10월 1일에 조지아 주 플레인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성장기는 땅콩농사, 정치에 관한 토론, 돈독한 침례교 신앙심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1946년에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소재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로잘린 스미스와 결혼했다. 카터 부부는 슬하에 3남 1녀(존 윌리엄(잭), 제임스 얼 3세(칩), 도넬 제프리(제프), 에이미 린)를 두었다.

해군장교로 7년 간 복무한 뒤 카터는 플레인스로 되돌아왔다. 1962년에 그는 조지아 주 정치무대에 진출했고 8년 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남부의 젊은 정치신인 주지사들 사이에서 카터는 생태, 정부 효율, 인종장벽의 철폐를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카터는 1974년 12월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그 후 2년 동안 선거운동을 통해 지지기반을 점차 늘려갔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1차 투표에서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다. 그의 러닝메이트에는 미네소타의 월터 F. 먼데일 상원의원이 선택되었다. 카터는 현직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R. 포드와 세 차례에 걸쳐 토론을 벌이며 강력한 선거유세를 진행했다. 카터는 선거인단수에서 297 대 241로 포드를 눌렀다.

카터는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그의 임기말에는 8백만에 이르는 신규 일자리 창출과 GDP 대비 재정적자폭 감소를 결과물로 내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인플레이션과 금리는 사상 최고 수준에 육박해 있었고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조치들은 단기적인 경기후퇴를 불러왔다.

카터 행정부는 국내문제에서 다수의 공적을 세웠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국가차원의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고 국내 유가를 자유화하여 생산을 장려함으로써 에너지 부족사태에 대처했다. 그는 공무원 조직 개혁을 통해 정부 효율을 개선시켰고 화물운송과 항공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었다. 환경을 개선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었다. 기존의 국립공원 체계를 확대시켜 알래스카 지방의 1억 3백만 에이커가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사회복지사업 확대를 위해 교육부를 신설하고,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했으며, 사상 최대규모로 여성, 흑인, 히스패닉계를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카터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했다. 소련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카터의 인권옹호론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평화협상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중동분쟁이 화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파나마운하 조약의 인준도 얻어냈다. 전임 대통령들이 닦아놓은 기반을 토대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으며 소련과의 제2단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II)의 협상을 마무리했다.

그러나 심각한 난관들도 있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SALT II 협정 인준계획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대사관 인질사건은 카터 행정부의 마지막 14개월 동안 언론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국내 인플레이션 문제와 함께 이란 인질사건의 여파는 카터가 1980년 대선에서 패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순간에도 카터는 인질생환을 놓고 어려운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란은 카터가 백악관을 떠나는 날 52명의 인질을 석방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