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해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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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해리슨은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한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첫 번째 ‘현관 앞’ 선거유세를 벌인 뒤 미국의 제2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재임했다.

1888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여덟 차례의 재투표 끝에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벤자민 해리슨은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그의 자택을 방문한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첫 번째 ‘현관 앞’ 선거유세를 벌였다. 키가 5피트 6인치(165cm)에 불과했던 그를 두고 민주당에서 ‘작은 벤’이라고 공격하자 공화당은 해리슨이 자신의 할아버지인 ‘늙은 티페카누’의 모자를 쓸 수 있을 만큼 크다고 받아넘겼다.

신시내티 남쪽의 오하이오 강가에 자리한 농장에서 1833년에 태어난 해리슨은 오하이오에 소재한 마이애미 대학을 졸업하고 신시내티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그는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주하여 변호사로 개업했고 공화당을 위해 선거운동에 참가했다. 그는 1853년 캐롤라인 라비니아 스콧과 결혼했다. 제70 자원군 보병대의 대령으로 남북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명석한 변호사로서의 명성을 키워가며 인디애나폴리스의 기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1876년에 민주당은 그에게 ‘키드 가죽장갑’ 해리슨이라는 근거 없는 오명을 씌워 인디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하게 만들었다. 1880년대에 해리슨은 연방 상원의원을 지내면서 인디언, 자작 농장주, 남북전쟁 참전 군인들의 권익을 옹호하였다.

대통령선거에서 해리슨은 클리블랜드보다 일반투표에서는 10만 표 뒤졌지만 선거인단수에서는 233 대 168로 승리를 거두었다. 해리슨 본인은 정치적 거래를 전혀 하지 않았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대신하여 수많은 공약을 남발했다.

펜실베이니아의 보스 맷 키는 해리슨이 자신의 아슬아슬한 승리를 하늘의 뜻으로 돌렸다는 말을 전해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교도소 문턱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갔었는지” 해리슨은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탄식했다.

해리슨은 자신의 노력으로 그 모양을 갖추게 된 미국의 강력한 대외정책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1889년에 제1회 범(汎) 아메리카 회의가 워싱턴에서 개최되었고 이후 범 아메리카 연방으로 발전하게 될 정보센터를 설립하였다. 임기 말에 그는 상원에 하와이 합병 조약안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차기 대통령인 클리블랜드가 이 조약안을 철회했다.

해리슨은 내륙개발, 해군력 증강, 증기선 운항을 위한 국고보조금 등의 목적으로 어마어마한 액수의 정부 지출안에 서명했다. 전시를 제외하고는 최초로 의회가 승인한 예산이 1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에 대해 ‘10억 달러 의회’라는 비난이 일자 토마스 B. 리드 하원의장은 “미국은 10억 달러를 쓸 만한 국가”라고 응수했다. 해리슨은 “무역과 상업을 불법적인 제약과 독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독점적 기업행태를 규제하는 최초의 연방 법률인 ‘셔먼 반독점법’에도 서명했다.

해리슨이 직면했던 국내문제 중 가장 큰 난제는 관세 논쟁이었다. 사실상 고율의 관세가 재정의 흑자를 유지시키고 있었다. 관세율 인하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이러한 흑자로 인해 기업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의회의 공화당 지도부는 이 도전에 능란하게 대처했다. 윌리엄 매킨리 하원의원과 넬슨 W. 알드리치 상원의원은 여전히 높은 수준의 관세율을 유지하는 법안을 마련했다. 이들 관세율 중 일부는 의도적으로 금지관세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해리슨은 상호주의 조항을 문서화함으로써 관세율 인하에 대한 저항을 줄이고자 하였다. 연방정부재정 흑자폭을 줄이기 위해 수입 원당에 대한 관세를 철폐하는 대신 국내 생산자에게 생산량 1 파운드 당 2센트씩을 국고에서 보조하였다.

해리슨 행정부의 임기가 끝나기 한참 이전에 연방정부 재정흑자는 모두 증발했고 호황도 곧 사라질 것처럼 보였다. 1890년 의원선거는 공화당에게 뼈아픈 결과를 가져왔고 당 지도부는 해리슨이 비록 법안 통과에 있어서는 공화당에 협조하고 있었지만 대선에서 그를 추대하지 않기로 당론을 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2년 대선에서 당은 해리슨을 대통령 후보자로 지명했지만 결국 클리블랜드에게 패하고 말았다.

퇴임 후 해리슨은 인디애나폴리스로 돌아와 1896년에 미망인이었던 매리 디믹과 결혼했다. 위엄을 갖춘 원로 정치인이었던 그는 1901년에 세상을 떠났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