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퍼스 페리 습격

John Brown
John Brown

1859년 10월 16일
하퍼스 페리를 인질로 잡은 존 브라운


849년 10월 16일 늦은 밤, 존 브라운(John Brown)과 그를 따르던 21명의 무장한 사람들이 버지니아의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 현재 웨스트 버지니아의 일부임)로 몰래 들어갔습니다. 이 때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현지의 유력 인사 60명을 인질로 잡고 마을의 미군 무기고와 장총 공장을 점거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자유인인 흑인 3명과, 해방된 노예 1명과, 도망친 노예 1명이 포함된 이들은 해방된 노예의 반란을 일으켜 ‘해방군’(army of emancipation)을 조직하려고 했습니다. 이들은 노예제도를 무력으로 뒤엎으려 했던 것입니다.

한밤 중의 기습으로 이들은 유리한 입장에 있었지만, 이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저녁 무렵, 이들은 포위되어 엔진실(engine house)에 숨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날 로버트 리(Robert E. Lee) 대령이 이끄는 군대가 이 건물을 기습했고, 브라운은 생포되었습니다. 브라운은 신속하게 재판에 회부되어 살인, 노예 반란, 주에 대한 반역 혐의로 유죄를 선고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이 습격에서 브라운은 두 명의 아들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존 브라운은 노예제도에 대항한 싸움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싸웠습니다.

브라운은 ‘노예를 소유한 사회는 그 성격상 전쟁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과감한 행동이 필요했고 또 그렇기 때문에 과감한 행동이 정당했다’고 주장했습니다. 10년 동안이나 노예 해방을 위해 노력해 온 브라운은 갈수록 공격적인 방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하퍼스 페리 습격은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감정을 모두 격화시켰습니다.

존 브라운의 습격은 어쩌면 남북전쟁을 촉발시킨 마지막 도화선이었을 것입니다. 브라운이 죽기 직전에 남긴 말은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정의를 위해 내 목숨을 버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또, 내 피를 죽은 내 자식의 피와 섞고, 사악하고, 잔인하고, 부정한 법률에 의해 그 권리가 무시 당하고 있는 이 노예국가에 사는 수 백만의 피와 섞을 때가 온 것 같습니다. 이제, 그렇게 되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