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령 죽이기

Elijah Parish Lovejoy
Elijah Parish Lovejoy

1837년 11월 7일
일라이저 패리쉬 러브조이 피살


1837년 11월 7일, 일라이저 패리쉬 러브조이가 반 노예제도 성향의 신문 ‘세인트 루이스 업저버’ 지(The Saint Louis Observer) 현장을 지키다 노예제도 폐지에 반대하는 군중에게 피살되었습니다. 러브조이의 피살은 북부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노예제도 폐지론자의 명분을 크게 강화시켰습니다. 러브조이가 누구이고, 왜 이 사람의 죽음이 미국 전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을까요?

1802년 메인의 앨비언(Albion)에서 태어난 러브조이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중서부에서 큰 돈을 벌고자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러브조이는 세인트 루이스 타임즈 지(The St. Louis Times)의 편집장 겸 일부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1831년, 미국 전역을 휩쓴 강력한 종교 부흥 운동에 휩쓸린 러브조이는 신문사 지분을 팔고 종교를 공부하기 위해 동부로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세인트 루이스의 사업가들이 러브조이를 종교와 도덕 교육 증진을 위한 신문인 세인트 루이스 업저버 지의 편집장으로 채용했습니다. 러브조이는 에드워드 비쳐(Edward Beecher.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인 해리엇 비쳐 스토우의 남자 형제)와 같은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친구들의 지원을 받아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사설을 썼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노예제도에 반대하고 노예제도 폐지에 찬성하는 러브조이의 논조는 더욱 강해졌습니다.

1837년, 러브조이는 즉각적이고 보편적인 노예해방을 주장했습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신문의 발행부수는 늘어났지만 현지에서 노예제도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자극하게 되었습니다. 노예제도 문제와 관련된 군중 폭력이 증가하면서 러브조이의 인쇄기가 파괴되는 일이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러브조이는 가족의 안전이 걱정되어 폭력이 잦아들기를 기대하며 비 노예 주인 일리노이의 앨튼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1837년에 새 인쇄기가 들어오자 폭력이 다시 확대되기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