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빅 그린’ (Big Green)!

The_Reverend_Eleazar_Wheelock_by_Joseph_Steward
The_Reverend_Eleazar_Wheelock_by_Joseph_Steward

1769년 12월 13일
다트머스 대학을 세운 엘리어자 월락 목사


‘빅 그린’(Big Green)이라는 별명을 가진 다트머스 대학은 미국 최고 수준의 대학이지만, 처음에는 통나무 오두막으로 시작했습니다. 엘리어자 윌락 목사는 1769년 12월 13일, 왕의 설립인가를 받아 이 대학을 세웠습니다. 1754년부터 윌락 목사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위한 자선학교를 세우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윌락 목사는 뉴 햄프셔 지방으로 옮기면서 토머스 웬트워스(Thomas Wentworth) 총독의 도움을 받아 대학 설립인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대학은 ‘이 땅의 청년과 인디안 부족과 … 영국의 청년과 그 외 다른 이들에게 교육과 가르침’을 주기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아홉 번째로 오래된 다트머스 대학은 웬트워스 총독이 제공한 부지에 세워졌으며, 웬트워스 총독의 친구이자 중요한 재정 지원자인 다트머스 백작 윌리엄 레게(William Legge)를 기리는 뜻으로 ‘다트머스’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의 첫 입학생들은 1770년 뉴 햄프셔 하노버에 있는 단 한 채의 통나무 오두막에서 학생 단 네 명이 모인 가운데 강의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한 대학이 성장과 번영을 거듭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은 1815년에 설립의 문제와 관련된 드라마의 무대가 되었으며, 이는 후에 오랫동안 대학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뉴 햄프셔 의회는 1769년의 설립인가가 무효라고 주장하며, 다트머스 대학을 운영할 새로운 기구를 설립하고 대학의 이름을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University)로 바꾸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의 이사들은 이를 미국 대법원에 제소했습니다.

후에 국무장관이 된 대니얼 웹스터 변호사(다트머스 대학 1801년도 졸업생)는 본래의 설립인가가 아직 유효하므로 다트머스 대학이 주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사립 교육기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마셜 판사와 대법원도 이에 동의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 사건은 다른 사립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용이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은 지금도 조그만 사립대학으로 유지되고 있으며, 1972년부터 남녀 공학을 실시하여 미국 내 모든 주와 전세계 40여 개국에서 온 학부생 4,300명과 대학원생 1,200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트머스 졸업생 중 유명한 사람으로는 ‘수스 박사’(Dr. Seuss)로 잘 알려진 시어도어 가이즐(Theodor Geisel. 1925년도 졸업생)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트머스 대학의 모토는 ‘황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뜻의 vox clamantis in deserto이며, 이는 조그만 통나무 오두막에서 시작한 대학의 역사를 생각하면 아주 적절한 구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