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일요일!

Sunday Bloody Sunday
Sunday Bloody Sunday

1965년 3월 7일
셀마에서 시작된 첫 행진


1965년 3월 7일 일요일 525명이 모여 셀마에서 앨러배마의 몽고메리까지로 계획된 행진을 시작했을 때, 주 당국은 이를 시위로 규정했습니다. 주 방위군이 시의 끝 지점인 에드먼드 피트스 다리(Edmund Pettus Bridge)에서 시위대와 조우했을 때, 이 날은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시위대는 왜 행진을 했을까요?

미국 남북전쟁이 끝난 지 100년이 지났는데도, 많은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은 여전히 투표를 위해 유권자 등록을 하는 것을 막거나 어렵게 하는 장애물에 막혀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들은 셀마에서 인구의 거의 절반을 구성하고 있었으나, 그 중 유권자 등록을 한 사람은 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흑인을 향한 차별과 위협의 전술이 흑인들의 유권자 등록과 투표를 막고 있었습니다. 시위자들은 유권자 등록의 공정성을 요구하기 위해 행진을 했습니다.

존 루이스(John Lewis)가 이 행진을 조직한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앨러배마의 물납 소작인의 아들로 25세였던 루이스는 인종분리를 종식시키고 흑인 유권자를 등록시키는 데 헌신한 조직인 학생 비폭력 조정 위원회(Student Nonviolent Coordinating Committee: SNCC)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운동은 비폭력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루이스와 다른 지도자들은 시위자들에게 평화적 시위 중에 누가 폭력을 가하더라도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중무장한 주 방위군과 맞닥뜨렸을 때, 시위대는 어떻게 했을까요?

시위대는 잠시 멈추었다가 행진을 계속했습니다. 보안관은 2분 내에 해산하라고 경고했지만, 방위군은 2분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시위자들은 최루탄 세례를 받았고, 곤봉에 맞았고, 뱉는 침을 맞았고, 채찍질을 당했고, 말에 짓밟혔고, 유권자 등록의 권리를 요구하는 데 대해 다른 사람들의 조롱도 받았습니다. TV와 신문은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이 사건의 사진을 보도했습니다.

그 사진들은 미국 전역의 국민들의 역겨움과 분노를 샀고, 전국의 국민들이 떨쳐 일어나도록 했습니다. 48시간 내에, 시위자들을 지지하는 시위가 전국 80개 도시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비롯한 미국의 여러 종교 지도자와 세속 지도자들이 셀마로 날아왔습니다. 행진이 한 번 더 실패한 뒤, 킹 목사가 셀마에서 몽고메리로 가는 평화적 행진을 이끌었습니다. 의회는 이 사건을 계기로 1965년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 of 1965)을 제정했습니다.

존 루이스는 그 후 유권자 교육 프로젝트(Voter Education Project: VEP)의 사무총장이 되어 400만 명에 가까운 소수민족 유권자를 등록시킨 이 조직을 이끌었습니다. 존 루이스는 현재 미국의 하원의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