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위르츠의 교수형

Execution_of_Henry_Wirz
Execution_of_Henry_Wirz

1865년 11월 10일
전 남부동맹 포로 수용소장 헨리 웨르츠의 사형 집행


1865년 11월 10일 아침, 헨리 위르츠는 구 의사당(Old Capitol)의 감방에서 일어나 아내에게 마지막 편지를 썼습니다. 조지아 앤더슨빌(Andersonville)에 있던 악명 높은 포로 수용소의 지휘관이었던 위르츠는 그날 워싱턴 DC에서 사형 집행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1865년 5월 7일, 남북전쟁이 끝나고 스위스 태생의 위르츠가 체포되었을 때, 위르츠는 남부동맹 군으로는 유일하게 포로 수용소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방 군의 눈에는 위르츠가 남부동맹 군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앤더스빌 포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모든 비극을 다 책임져야 할 불행한 상황에서 사로잡힌 위르츠에게는 공정한 재판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위르츠는 군사 재판소에서 남부동맹 대통령인 제퍼슨 데이비스와 더불어 ‘미합중국 장병의 건강을 해치고 그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공모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습니다. 위르츠는 모든 혐의에 대해 유죄 평결을 받고 공개 처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왜 그렇게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을까요? 앤더슨빌 포로 수용소가 그렇게 끔직했던 이는 무얼까요?

1863년까지 연방 군과 남부동맹 군은 정기적으로 포로를 교환함으로써 전쟁포로의 수를 최소로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미합중국 당국이 포로 교환을 중단하자 리치먼드의 연방 군 포로가 관리하기 어려운 규모로 불어났습니다. 포로 교환은 남부동맹이 흑인 포로를 교환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중단되었습니다. 그래서, 앤더슨빌 포로 수용소가 급하게 건설되었고, 이 때문에 시설이 거의 제대로 갖춰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포로는 계속 들어왔고, 스스로 잠 잘 곳을 지어야 했고, 먹을 것을 스스로 찾아 끼니를 해결해야 했고, 오염된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많은 포로가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1864년과 1865년 중에 앤더슨빌 포로 수용소에 수용된 49,485명의 포로 중 13,000명 이상이 수용소에서 죽었습니다.

머리에 검은 두건을 쓰고 교수대로 끌려간 헨리 위르츠는 이 모든 비극의 대가를 자신의 목숨으로 치러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