랠프 왈도 에머슨 : 자립 (1841)

Ralph Waldo Emerson
Ralph Waldo Emerson

랠프 왈도 에머슨(1803-1882년)은 민주주의의 시인이자 19세기 중엽 미국의 지식생활을 고무한 초월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다. 초월주의는 ‘이성’을 인간 최고의 능력, 즉 지성과 감성의 완전한 발현을 통하여 아름다움과 진실을 이해하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으로 정의하였다. 이 운동은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지식인 그룹에서 출발하였는데, 에머슨은 이 운동의 지적 지도자인 동시에 가장 탁월한 대변자였다.

일신론 목사 교육을 받은 에머슨은 1832년 교회를 떠나 미국 고유의 철학을 위한 저술, 강의 및 육성 활동에 헌신하였다. ‘미국의 학자’(“The American Scholar”, 1837년)에서 그는 국민들에게 유럽에서 지적으로 독립함으로써 이미 성취된 정치적 독립을 보완하자고 주창하였다. 헨리 클레이(Henry Clay)는 ‘우리는 해외를 너무 많이 본다… 진정한 미국인이 되자’고 말하였다. 하버드에서 한 연설에서 에머슨은 ‘왜 우리는 전통에 의한 시와 철학이 아니라 통찰력에 의한 시와 철학과 우리에게 계시된 종교를 가지지 못하는가? 우리 자신의 작품과, 법과 신앙을 요구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는 이 연설을 가리켜 ‘우리의 지적 독립 선언문’이라 하였다.

에머슨은 그 시와 수필에서 미국의 삶에서 그가 발견하는 다양성과 자유를 찬미하였고, 개인적인 삶에서 과감하게 독립성을 추구함으로써 자유를 누릴 자격을 갖출 것을 미국인들에게 요구하였다. 그의 가장 유명한 수필에서, 에머슨은 ‘자신의 마음의 고결성 외에 궁극적으로 신성한 것은 없다’고 선언하였다. 자립의 추구는 사실 우주의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각 개인이 그 자신만의 독특한 자아실현 수단을 추구함으로써 만 실현될 수 있다. 에머슨은 조직화된 종교가 영혼의 숨을 막는다고 공격함으로써 전통적 사회집단의 분노를 샀다. 그는 개인의 신성함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추구할 수 있는 개성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에머슨은 여기에서도 이상주의자가 오해 받을 수 있다는데 주목하였다.

당초 에머슨은 사랑하는 철학을 위해 ‘현실’ 세계를 피하였다. 그는 비록 노예제도에 반대하기는 하였지만, 흑인 노예제도의 종식을 요구하는 급진적 노예제도 폐지론자 단체를 오랫동안 피하였다. 그러나, 우상으로 삼고 있던 대니얼 웹스터(Daniel Webster)가 대중의 신뢰를 배신하고 1850년 도주노예법(Fugitive Slave Law)을 지지하자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였다. 그 후 10년 동안 그는 도망 노예를 숨겨주고 공개적으로 노예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발언을 하였다.

관련 추가자료: 게이 윌슨 엘런(Gay Wilson Allen) ‘왈도 에머슨’(Waldo Emerson), 1981년, 스테픈 E. 위처(Stephen E. Whicher) ‘자유와 운명: 랠프 왈도 에머슨의 내면세계’(Freedom and Fate: An Inner Life of Ralph Waldo Emerson), 1953년, 필립 E. 구라(Philip F. Gura)와 조엘 마이어슨(Joel Myerson), eds., ‘미국 초월주의에 관한 비판적 에세이’(Critical Essays on American Transcendentalism), 1982년.

자립: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보지 말라(Ne te quaesiveris extra).

인간은 스스로에게 별과 같은 존재이며, 정직하고 완벽한 사람을 만드는 영혼이며, 모든 빛과, 영향력과 운명을 통제하는 존재이다. 인간에게는 일찍 떨어지는 것도 없고 너무 늦게 떨어지는 것도 없다. 우리의 행동, 우리의 천사는, 그 선악과 관계 없이 우리 옆을 조용히 걷는 운명의 그림자이다.
– 보몽과 플레처(Fletcher)의 ‘정직한 자의 운명’(Honest Man’s Fortune)의 에필로그.
개구쟁이를 바위산에 던지고, 암컷 늑대의 젖꼭지를 빨리고, 매와 여우와 더불어 겨울을 나게 하면, 그 손과 발이 강하고 빨라지리라.
어는 날 저명한 화가가 쓴 독창적이고 비전통적인 시를 읽었다. 영혼은 그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이러한 글에서 항상 꾸짖음을 듣게 된다. 이러한 글이 고무하는 정서는 글 속에 담긴 생각 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자신의 마음 속에 진실한 것이 만인에게 진실하다고 믿는 것, 이것은 천재성의 발현이다. 자신에게 잠재된 확신을 말하라. 보편적인 생각이 될 것이다. 가장 내적인 것이 때가 되면 가장 외적인 것이 되고, 우리의 처음 생각이 마지막 심판의 나팔소리와 더불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마음의 목소리만큼 친근한 모세와 플라톤과 밀턴에 대하여서, 이들의 가장 큰 장점으로 우리가 평가하는 바는 이들이 책이나 전통에 기대지 아니하고, 또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표현하였다는 점이다. 인간은 음유시인이나 현자가 노래한 창공의 광채 보다 마음 속으로부터 반짝이는 섬광을 감지하고 보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모르는 사이에 자기의 생각을 자기 것이라는 이유로 무시한다. 천재의 모든 작품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발견하고, 스스로 거부한 자신의 생각이 타인의 권위를 가지고 다시 돌아옴을 보게 된다. 위대한 예술작품이라고 해서 이 보다 더 큰 교훈을 우리에게 주지는 아니한다. 위대한 예술작품은 대부분의 다른 작품의 목소리가 정 반대편을 가리키고 있는 경우에도 우리의 자연적인 느낌을 명랑한 의지를 가지고 따르도록 가르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내일 낯 모르는 사람이 우리가 항상 생각하고 느낀 바를 정확하게 말할 것이며, 이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부끄럽게 받아 들이게 된다.

모든 사람의 교육에서는 시샘이 무지이고, 모방이 자살이며, 좋건 나쁘건 간에 자기 자신을 받아 들여야 하며, 드넓은 우주에 좋은 것이 가득하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땅을 경작하고 수고하지 아니하면 옥수수 알 하나도 오지 아니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는 때가 있다. 인간에게 내재한 힘은 새로운 것으로, 그 자신 외에는 그 능력을 알 수 없고, 시도해 보기 전에는 그 능력을 알 수 없다. 그냥 되는 것은 없으며, 하나의 얼굴과, 성격과, 사실은 인간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고 다른 얼굴과, 성격과, 사실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기억의 구조에도 미리 형성된 조화가 존재한다. 눈은 한 줄기 빛이 떨어지는 곳에 놓이며, 눈은 특정한 빛을 증언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절반밖에 표현하지 못하며, 우리 각각이 나타내는 신성한 아이디어를 부끄러워한다. 이는 균형 잡힌 훌륭한 이슈로 믿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고, 이는 충실히 전해질 것이지만, 신은 그 뜻을 겁쟁이가 전하도록 하지 아니한다. 사람은 마음을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한 후에야 안심하게 되고 명랑하게 된다. 그러나, 말한 바나 달리 행한 한 바는 아무런 마음의 평화도 주지 못한다. 이는 구원하지 아니하는 구원이다. 이 시도에서 천재성이 그를 버리고, 뮤즈가 친구하지 아니하며, 발명도 없고 희망도 없다.

자신을 믿으라: 모든 가슴이 이 강철로 된 실을 향해 뛴다. 신의 섭리가 당신을 위해 준비한 곳, 당신의 동시대인의 사회, 사건의 연결고리를 받아 들이라. 위대한 사람은 항상 이를 실천해 왔으며, 당대의 천재에게 스스로를 아이처럼 맡겼고, 절대적으로 믿을만한 것은 가슴에 있다는 생각을 털어놓고, 손으로 일하고, 모든 존재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인간으로서 동일한 초월적 운명을 가장 높은 이성으로 받아 들여야 하며, 보호 받는 곳에 있는 미성년자나 병약자가 아니라, 또 혁명을 앞두고 도망가는 겁쟁이가 아니라, 신의 전능한 노력에 복종하고 혼란과 어둠 속에서 나아가는 길잡이, 구세주, 후원자가 되어야 한다.

자연은 어린이와, 아기와, 심지어 짐승의 얼굴과 행동의 텍스트에 얼마나 아름다운 계시를 내리는지! 우리가 목적에 반하는 힘과 수단에 대한 계산을 끝내고 분열된 반역의 마음과 불신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들은 그렇지 아니하다. 이들의 마음은 하나이며, 이들의 눈은 아직 정복되지 아니하였으며, 이들의 얼굴을 볼 때 우리는 당황하게 된다. 아기는 누구도 따르지 아니하나, 모두를 따르게 한다. 그래서, 아기 하나는 어른 네다섯 명이 말을 걸고 장난치게 만든다. 하늘은 아기와, 청소년과, 어른에게 똑 같은 기지와 매력을 주었고, 아기를 탐스럽고 우아하게 만들었으며, 아기가 제 주장을 하고자 할 경우 그 주장이 무시되지 아니하도록 하였다. 아기가 말을 할 수 없다고 힘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라. 들어보라! 옆 방에서도 아기의 목소리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들리지 아니하는가! 아기는 동시대인에게 이야기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아기가 숫기가 있건 없건 간에, 아기는 어른을 아주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다.

식사를 확신하면서, 회유하기 위한 말이나 행동을 하는 자를 멸시하는 아이의 무심함은 건전한 인간 본성의 태도이다. 거실에 있는 아이는 극장의 맨 앞 자리와 같다. 독립되어, 책임 지는 바도 없이, 자기 자리에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사실들을 내다보며, 그들의 장점을 아이다운 재빠르고 요약적인 방식으로 표현한다. 좋다, 나쁘다, 재미있다, 바보 같다, 말 잘 한다, 문제가 많다 등… 아이는 결과나 이익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지 아니한다. 아이는 독립적이고 진실한 의견을 제시한다. 어른이 아이의 환심을 사려할 뿐, 아이는 어른의 환심을 사려하지 아니한다. 어른은 그 자각에 의하여 감옥에 갇힌 것과 같다. 어른은 한 번 행동이나 말을 통하여 갈채를 받게 되면 공인이 되어 수 백 명으로부터 호감이나 반감의 눈길을 받게 되며, 이들의 애정을 고려하지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이를 망각하기는 불가능하다. 다시 중립적인 자리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따라서, 모든 약속에서 자유로운 가운데 영향 받지 아니하고, 편견 없이, 뇌물로 회유할 수 없고, 위협할 수 없는 순수함으로 관조하고 다시 관조하는 자는 항상 두려운 존재가 된다. 그런 자는 모든 지나가는 문제를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문제로 보고 이에 대하여 의견을 말하며, 이러한 의견은 사람의 귀에 화살처럼 박혀서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러한 목소리는 우리가 고독 속에서 듣는 목소리이며, 우리가 세상에 들어서면서 희미해지고 들리지 아니하게 되는 목소리이다. 어디서든 사회는 그 모든 구성원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다. 사회는 그 구성원들이 각 주주에게 돌아오는 빵을 더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빵을 먹는 자의 자유와 문화를 포기하는 합자 회사다. 대부분의 요청에서 순응은 미덕이며, 자립은 악덕이다. 사회는 실질과 창조성이 아니라 이름과 관습을 사랑한다.

어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순응하지 아니하여야 한다. 불멸의 야자나무를 얻고자 하는 자는 선이라는 이름에 구애 받을 필요가 없으며, 그것이 과연 선인지 아닌지를 마땅히 따져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의 고결성 외에 궁극적으로 신성한 것은 없다. 스스로의 죄를 사하면, 세상의 동의를 얻게 된다. 내가 어렸을 때 교회의 케케묵은 원리로 나를 귀찮게 하는 데 익숙한 소중한 조언자가 나에게 원했던 대답이 기억 난다. ‘내가 온전히 마음이 시키는 대로 산다면 내가 전통의 신성함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라고 내가 말했을 때, 친구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런 충동이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지않아?”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만약 내가 악마의 자식이라면 악마로서 살게 되겠지.” 나에게는 내 본성의 율법 외에는 신성한 율법이 없었다. 선과 악은 서로 쉽게 바뀔 수 있는 이름일 뿐이고, 나의 본성에 따른 것만이 옳은 것이며 나의 본성에 따르지 아니한 것은 옳지 아니한 것이다. 사람은 자신 외에는 모두가 이름뿐이고 덧없는 것처럼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배지와 이름, 큰 집단, 죽은 기관에 얼마나 쉽게 항복하는지를 생각하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고상하고 달변인 사람들은 모두 올바른 길에서 나를 해치고 흔든다. 나는 똑바로 서서 활기차게 나아가야 하며 그렇게 나아가는 모든 길에서 진실을 거리낌 없이 말하여야 한다. 악의와 허영이 박애주의의 허울을 쓴다면, 그것이 통할 것인가? 분노한 편집광이 노예제도 폐지라는 자비로운 명분을 입고, 나에게 와서 바베이도스(Barbadoes)의 최신 뉴스를 말해준다면, 내가 이렇게 말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가서 아기를 사랑하라. 나무꾼을 사랑하라. 좋은 품성을 가지고 겸손하라. 품위를 가지라. 냉혹하고 무자비한 야심을 천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흑인에 대한 사랑으로 포장하지 말라. 먼 것을 사랑함은 가까이 있는 것을 사랑하지 못함이다.” 이런 말은 거칠고 우아하지 못하겠지만, 사랑을 가장하는 것 보다는 아름답다. 선에는 예리함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아니하다면 선은 아무 것도 아니다. 사랑의 원리가 시름에 잠기고 신음할 때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증오의 원리에 대하여서도 설교해야 한다. 내 천재성이 나를 부를 때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형제도 피한다. 문틀 위쪽 가로대에 ‘변덕’이라고 쓴다. 궁극적으로 변덕 보다는 나은 무엇이기를 바라지만 이를 설명하느라 하루를 다 보낼 수는 없다. 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왜 피하고 왜 원하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 거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람들은 나에게 가난한 모든 자들을 행복하게 할 의무를 말하지 아니한다. 물론, 오늘 어떤 선량한 사람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나의 가난한 자들인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자에게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어리석은 박애주의자들아! 그들이 나에게 속하지 아니하고 나도 그들에게 속하지 아니할진대, 그러한 그들에게 주는 달러 지폐 한 장, 10 센트 동전 하나, 1 센트 동전 하나 까지도 나는 아까워한다. 소중한 정신적 유대가 있어, 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나를 온전히 바칠 수도 있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감옥에라도 갈 수 있다. 그러나, 잡다하고 통속적인 자선단체, 바보로 가득한 대학의 교육, 현재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고 있는 헛된 목적을 위한 회의장 건설, 술고래에 대한 자선, 수 천을 헤아리는 구민단체를 위해서는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가끔 이들에 굴복하여 돈을 낼 때도 있음을 부끄럽게 고백하여야 하겠다. 이렇게 주는 돈은 사악한 돈이며, 나는 곧 이를 이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될 것이다.

통속적인 판단으로 보면, 규칙 보다는 규칙의 예외가 미덕이다. 세상에는 사람과 그 미덕이 존재한다. 사람은 용기나 자선 등 남이 훌륭한 행동이라고 하는 행동을 한다. 이는 퍼레이드에 매일 참석하지 아니한 데 대한 속죄의 방편으로 벌금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행동이다. 사람이 하는 일은 모두 세상에 사는 데 대한 사과 또는 정상참작 사유로 하는 일이다. 이는 병약자나 정신이상자가 숙식비를 더 많이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의 미덕은 참회에 있다. 나는 속죄하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다. 내 삶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삶이 빛나고 불안정한 삶이기 보다는 낮은 삶이기를 바라고, 그래서 진실되고 안정된 삶이기를 바란다. 나는 내 삶이 건전하고 달콤한 삶이기를 바라며 식이요법과 출혈이 필요하지 아니하기를 바란다. 나는 당신이 어른이라는 1차적 증거를 요구하고 자기 행동에 동참하기를 요구하는 당신의 말을 거부한다. 훌륭하다고 판단되는 행동을 하든지 말든지 간에 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음을 나는 안다. 나는 내가 기본적 권리를 가진 특권에 대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데 동의할 수 없다. 내 재능이 적고 변변하지 못하지만, 그것이 나 자신이고, 이에 대하여 나 자신의 확인과 다른 사람의 2차적 확인은 필요 없다.

내가 걱정하는 것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느냐 하는 문제일 뿐,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다. 실생활과 지적 생활에서 똑같이 쉽지 아니한 이 규칙은 위대함과 야비함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이것이 더욱 더 어려운 것은 당신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당신 자신 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의견에 따라 살기가 쉽고, 혼자일 때는 자신의 의견에 따라 살기가 쉽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무리의 한 가운데에서도 완벽한 온화함으로 고독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죽은 관습에 순응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힘을 분산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시간을 소모할 뿐 아니라 성격에 대한 인상도 흐리게 한다. 당신이 죽은 교회를 유지하고, 죽은 성경회에 헌금을 내고, 정부를 지지하는지 반대하는지에 관계 없이 큰 정당에 투표하고, 천박한 가정부처럼 식탁을 펼친다면,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서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물론,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서도 올바른 삶에 써야 할 힘이 그만큼 소모된다. 그러나, 자신의 일을 한다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자신의 일을 하면 스스로를 강화할 수 있다. 사람은 이 순응의 게임이 ‘장님놀이’(blind-man’s-buff) 게임과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의 종파를 알면 당신의 주장을 미리 알 수 있다. 목사가 자기 교단의 기관 중 하나의 좋은 점을 다음 설교의 텍스트와 주제로 발표한다면, 이 목사의 설교에 새롭고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말이 포함될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내가 미리 모를 것인가? 또, 그 기관이 좋은 근거를 검증하는 체 하더라도 실제로 그리하지 아니할 것임을 내가 모를 것인가? 목사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교구 목사로서 한 쪽 면, 즉 허용된 면만을 보게 될 것임을 내가 모를 것인가? 목사는 고용된 변호사이며, 신자들의 분위기는 공허한 가장에 지나지 아니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수건으로 눈길을 고정시키고 어떤 의견의 공동체에 자신을 소속시킨다. 이러한 순응을 통하여 사람들은 몇몇 각론에서 틀리지 아니하게 되고 몇 가지 거짓말을 하게 되지만, 나머지 모든 각론에서 틀리게 된다. 이들의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이들이 말하는 ‘2’는 ‘2’가 아니며, 이들이 말하는 ‘4’는 ‘4’가 아니다. 따라서, 이들이 하는 말은 모두 우리를 실망시키며,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하여야 할지 알 수 없다. 한편, 자연은 우리가 지지하는 정당의 죄수복을 재빨리 우리에게 입혔다. 우리는 단 한 가지 얼굴과 모양을 가지게 되었고 가장 부드럽고 우둔한 표정을 점차 가지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아니할 수 없는 굴욕적인 경험이 있다. 바로 ‘찬미의 바보스러운 표정’, 즉 우리가 편안하지 아니한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또는 관심 없는 대화에 대한 답례로, 억지로 짓는 미소를 말한다. 이 때 근육은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노력에 의하여 움직이게 되며, 얼굴의 윤곽이 딱딱해지며, 가장 기분 나쁜 느낌이 들게 된다.

순응하지 아니하는 자에 대하여 세상은 그 노여움으로 벌을 내린다. 따라서, 사람은 불쾌한 얼굴을 평가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방관자들은 거리에서나 친구 집 거실에서 사람을 탐탁하지 아니하게 쳐다본다. 이러한 반감이 자신과 같은 경멸과 저항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슬픈 얼굴로 집에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불쾌한 표정은 기분 좋은 표정과 마찬가지로 깊은 뜻이 없으며 바람이 불거나 신문이 시키는 대로 얼굴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의 불만은 상원이나 대학의 불만 보다 무서운 것이다. 세상을 아는 단호한 사람이 교양 있는 계급의 분노를 참는 것은 쉽다. 교양 있는 계급은 그 자체가 소심하고 나약하기 때문에 그 분노도 정중하고 신중하다. 이들의 여성적인 분노에 민중의 분노가 더해지면, 무지하고 가난한 자들이 깨어나면,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지력이 높지 아니한 야수적 힘이 얼굴을 찡그리고 으르렁거리게 되면, 이를 염려할 것 없는 사소한 일로 의연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큰 배포를 발휘하던 습관과 종교가 필요하다.

우리가 자기신뢰를 멀리하게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일관성이다. 타인이 우리의 미래 행적을 예측하는 데 있어 과거의 행적 외에 달리 의존할 것이 없기 때문에, 또 우리가 이들을 실망시키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우리가 과거의 행동이나 말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왜 지난 일을 돌아 보아야 하는가? 왜 과거에 공적인 자리에서 한 말에 어긋나지 아니하기 위해 기억의 시체를 끌고 다녀야 하는가? 과거에 한 말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심지어 순수한 기억의 활동이라 할지라도 기억에만 의존하지는 아니하여야 한다는 것이 지혜의 법칙인 것 같다. 과거를 눈이 천 개 달린 현재에 비추어 판단하고 매일 새로운 하루를 살아야 한다. 형이상학에서는 인격을 부정하고 신격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영혼의 경건한 제안이 있으면, 그 제안에 마음과 생명을 주어라. 마음과 생명이 신에게 모습과 색채를 줄 것이다. 요셉이 그 옷을 매춘부의 손에 둔 채 도망간 것처럼 이론을 버려라.

어리석은 일관성은 그릇이 작은 정치인과 철학자와 성직자가 좋아하는 협소한 마음의 도깨비이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위대한 영혼은 일관성을 걱정하느니 차라리 벽에 비친 그림자를 걱정할 것이다. 오늘 생각하는 바를 분명한 말로 표현하고, 내일 생각하는 바를 다시 분명한 말로 표현하라. 비록 오늘 한 말과 모두 어긋난다 할지라도. “아, 그러면 오해를 받을 텐데.” 오해를 받는 일이 대수인가? 피타고라스도 오해를 받았고, 소크라테스, 예수, 루터,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뉴턴, 그리고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순수하고 현명한 영혼들이 오해를 받았다. 위대하다는 것은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출처: 랠프 왈도 에머슨의 수필 및 작품 전집(The Complete Essays and Other Writings of Ralph Waldo Emerson, Brooks Atkinson, ed., 1940년), 14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