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과 뉴딜 정책(1929년부터 1941년까지)

New Deal by President Roosevelt
New Deal by President Roosevelt

1929년 주식 시장이 폭락하자, 시가 총액은 40%나 떨어졌고 그로 인하여 전세계는 대공황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게 되었다. 1933년이 되자 시가총액은 1929년의 1/5 수준으로 떨어졌다. 기업들과 공장들은 문을 닫았으며 은행들도 파산했다. 농부들의 소득도 거의 절반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1932년에는 미국인 4명 당 1 명 꼴로 실업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미국의 생산 능력과 소비 능력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발생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생산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미국의 농부들이나 임금 노동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선을 훨씬 넘어 과잉 생산의 문제가 나타났던 것이다.

1932년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대공황의 원인과 가능한 해결 방안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 후보는 점진적인 경기 회복을 선호했던 반면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후보는 연방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과감한 해결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루즈벨트는 미국 국민들에게 “새로운 합의(New Deal)”를 내세우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뉴딜은 그 동안 많은 유럽인들에게는 수 십 년 전부터 이미 익숙해 있던 사회적, 경제적 개혁 정책을 일부 도입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뉴딜이 다른 정책들과 분명히 달랐던 것은 그 전이었더라면 여러 세대가 지나야 이룰 수 있는 성과들을 아주 단기간에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뉴딜 정책을 발표하고 나서 불과 3 개월 만에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한 다양한 법안들을 시행했다. 도로, 교량, 공항, 공원 및 공공 시설들을 건설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들이 만들어졌다. 또 1933년 농민들에게 경제 구호를 제공하기 위하여 의회에서 통과된 농업조정법(Agricultural Adjustment Act (AAA))은 농가의 소득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1930년대 전반에 걸쳐서, 그리고 특히 1935년부터1938년까지 3년간은 대평원 지역(Great Plains)의 주들에 극심한 가뭄이 들고 “황진(Dust Bowl)”이라고 알려진 강풍과 모래 폭풍이 대평원 지역을 휩쓸어 대평원 지역을 황폐화했다.

뉴딜 정책은 수 많은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켰고 산업 생산 능력을 크게 제고하는 한편 상품들의 가격이 오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자체로 대공황이 막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좌파와 우파 양쪽의 압력에 직면하게 되자 새로운 경제 및 사회적 조치(제2의 뉴딜)들을 지원했다. 그러한 정책들 중에는 빈곤을 없애고 일자리를 제공하여 실업률을 낮추며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는 정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소위 제2의 뉴딜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정책에 있어서 주요 구호 기관이었던 취로 사업청(Works Progress Administration (WPA))은 단순히 복지 혜택을 제공하기 보다는 일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한 시도였다. 이 때 많은 건물, 도로, 공항 및 학교들을 세웠다. 한편 연방 극장 프로젝트(Federal Theater Project), 연방 예술 프로젝트(Federal Art Project) 및 연방 작가 프로젝트(Federal Writers Project) 등의 다양한 예술 분야의 투자를 통하여 많은 배우, 화가, 음악가와 작가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뉴딜의 가장 핵심적인 정책은 1935년 시행된 사회 보장법(Social Security Act)이었다. 사회 보장법은 사업주와 노동자들의 분담금을 토대로 고령자, 실업자 및 장애인들을 위한 사회 보험 제도를 정착시켰다. 그 결과 1936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2년의 대통령 선거보다 훨씬 큰 압도적인 차이로 대통령에 재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