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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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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4일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을 휴전으로 마무리했고 대통령 연임기간(1953~1961년) 내내 냉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연합군 총사령관으로서의 후광을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는 한국전을 휴전으로 마무리했고 대통령 연임기간 내내 냉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는 온건정책인 ‘현대적 공화주의’를 표방했으며 퇴임 때에는 “현재의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영향력 있으며 생산적인 국가”라고 말했다.

1890년에 텍사스에서 태어나 캔자스 주 애빌린에서 성장한 아이젠하워는 7형제 중 셋째였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만능 스포츠맨이었던 그는 웨스트포인트 입학허가를 받았다. 소위로 임관하여 텍사스에 배치된 동안 그는 메이미 저니바 다우드를 만나 1916년에 결혼했다.

군 경력 초기에 그는 존 J. 퍼싱, 더글라스 맥아더, 월터 크루거 장군 휘하에서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조지 C. 마셜 장군은 그를 워싱턴으로 불러들여 전략구상 작업에 참여하도록 지시했다. 그는 1942년 11월에 북아프리카에 상륙한 연합군을 지휘했으며 1944년 D-데이에는 프랑스로 진군한 병력의 총사령관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컬럼비아 대학 총장이 되었으나 1951년 당시 조직 중이던 나토군의 총지휘를 맡기 위해 학교를 떠났다. 얼마 후 그가 파견되어 있던 파리 인근의 나토본부를 방문한 공화당 사절단이 아이젠하워로 하여금 1952년 대선에 출마하도록 설득했다.

‘나는 아이크가 좋아요’라는 선거 슬로건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아이젠하워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협상을 통해 냉전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했다. 1953년 휴전협정 조인을 기점으로 남북한 군사분계선을 경계로 한 무장평화가 도래했다. 같은 해 스탈린의 죽음으로 러시아와의 관계에 변화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오스트리아에 중립국의 지위를 부여하는데 합의했다. 그 와중에 러시아와 미국 모두 수소폭탄의 개발에 성공했다. 가공할 만한 위력의 무기들이 세계를 위협하는 가운데 아이젠하워는 1955년 7월에 제네바에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정부의 수반들과 회담을 가졌다.

아이젠하워는 미국과 러시아 양국이 서로 자국의 군사시설 청사진을 교환하고 “양국 영토 내 시설의 항공사진을 상대국에게 제공하자.”고 제안했다. 러시아측은 이 제안에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줄곧 성의 있는 태도로 회담에 임하여 양국 간의 긴장은 크게 완화되었다.

1955년 9월에 아이젠하워는 콜로라도 주 덴버에서 갑자기 심장마비로 쓰러지게 된다. 그는 7주 후에 퇴원했고 1956년 2월에 의사들은 그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다고 진단했다. 그 해 11월에 아이젠하워는 재선에 성공했다.

국내정책에 있어서 아이젠하워는 중도노선을 추구했고, 뉴딜 및 페어딜 프로그램들을 대부분 승계했으며, 균형예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학교 내 인종차별정책 폐지가 시작되자 그는 아칸소 주 리틀록에 군대를 파견하여 연방법원명령이 제대로 준수되고 있는지 여부를 감독했다. 그는 군대 내에서의 인종차별 역시 완전히 철폐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미국 안에 이류시민이 존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적었다.

아이젠하워는 세계평화를 유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는 ‘비핵보유국’에 평화적인 목적으로 미국의 우라늄을 임차하는 ‘평화를 위한 원자력’ 프로그램의 진전을 만족스럽게 지켜보았다.

1961년 1월에 백악관을 떠나 게티즈버그에 있는 자신의 농장으로 돌아가기 전 고별사에서 그는 군사력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 동시에 광범위하고 장기간에 걸친 국방비 지출이 미국민의 생활방식에 잠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했다. 그는 “언젠가는 이룩될”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로 자신의 고별사를 마무리 지었다. 그가 1969년 3월 28일에 오랜 투병생활 끝에 숨을 거두던 순간에도 그의 고별사가 전하려 했던 두 주제는 여전히 시의적절하고 절박한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WhiteHouse.gov에 실린 각 대통령의 전기 출처: “미합중국의 대통령들(The President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프랭크 프라이델, 휴 시드니 공저). Copyright 2006 백악관역사협회(White House Historical Association).